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넋두리속에서의 해결책

담박제 2004. 4. 27. 00:42
 

   넋두리 속의 해결책


사람들이 무당을 찾고 싶을 때는 언제일까? 살다 보면 모든 것이 여의치 않아 힘들고 버거워질 때가 있다. 그럴 때 누군가에 의지하고 싶어지기 마련이다. 현실에서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에 부딪쳤을 때에도 마찬가지다. 혼자서 애써 풀어보려 하지만 막막하기만 하다. 누군가 시원하게 이 문제를 풀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찾게 되는 상대가 무당 일 것이다.  예기치 못하는 앞날에 대한 불안감, 혼자 결정하기 부담스러울 때에도, 무당을 찾게 될 것이다.

서구에서는 그런 역할을 주로 정신과 의사들이 도맡아 한다고 들었다. 작은 갈등이 생겨도 정신과를 찾는다고 한다. 분명한 해답을 얻으려 하기 보다는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문제 해결 방법을 찾으려는 방책일 것이다. 그만큼 그들이 외롭다는 얘기다. 반면에 우리의 정서로는 정신과 의사를 찾기보다 무당이나 점집을 찾는 것이 일반적이다. 적어도 무당은 정신과 의사와 달리 앞날을 예견하는 능력이 있다는 믿음의 존재이기 때문 일 것이다. 설령 앞날에 대한 예견이 빗나간다고 해도 사람들은 캄캄하기만 한 현실을 이겨내는 방편으로 그 예견에 의지 하곤 한다.

그러다 보니 무당은 상담을 의뢰하러 오는 이들의 기운을 감지해서 길흉을 가려서 나쁜 것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일러주기도 하고 신명의 도움으로 운세를 북돋을 방법을 찾아 제시한다. 죽은 조상을 가려내어 조상을 대우해 집안의 평안을 기원하기도 한다.

무당의 역할은 아무리 시대가 첨단으로 향하더라도 민족의 피를 타고 흐르는 정서 속에 깊숙하게 젖어있다고 생각한다.

샤머니즘은 자연과 영혼에 대한 숭배의식이다. 이를 바탕으로 점을 치고 병을 치료하기도 한다. 무당은 인간의 상식적인 세계와 초자연적인 미지의 세계를  이어주는 중개인으로서, 인간이 원하는 바를 성취시켜 주기 위해 신명에게 간절히 기원하는 존재다. 역사 속에서 우리의 뿌리인 단군 왕검도 무당이었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었던 고대의 왕들도 모두 샤먼이었다. 전통 무교가 외래 불교와 어우러지면서 절 안 의 산신각 등으로 수용되기도 했다. 일제 치하에서는 토속신앙인 무교가  한국의 정신이라는 이유로 완전히 금지되기도 했었다.  또한 해방 이후 서구문물이 밀려들면서 무당들은 구태의연한 비생산적존재로 낙인찍혀 정책적인 탄압을 받아야 했다. 그런 가운데 일부 변질된 무당들이 출현하는 결과가 초래되기도 했다.

사회가 다양하게 변모하다 보니 이젠 굿도 여러 형태로 변형되는 것 같다. 살아가는 방식도 그만큼 변화됐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든다.

요즘 주위 이야기를 들어보면 굿을 하면 세상에 이뤄지지 않는 것이 없을 것만 같다. 그렇게 세월의 흐름은 모든 것을 변모시키고 있다.  일부 무당은 모든 문제점을 현실에서 타파하기를 권하기 이전에  귀신의 조화를 내세우기 일쑤다. 그 모든 것을 신이 좌우한다고 인식시키기에 여념이 없는 일부 무당들 이야기를 들으면 화가 나기도 한다. 당신 역시 무당이면서 귀신의 조화를 내세우지 않느냐고 내게 몰아붙일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이는 귀신의 조화를 모르면 어떻게 무당이겠는가, 자신이 영검하지 못하니까 현실이란 단어를 내세워 사람을 현혹시키려든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나도 귀신을 내세우기도 한다. 그러나 귀신을 내세우기에 앞서 현실적인 문제를 먼저 되짚어본다. 분명 우리가 현실에서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기운이 있다는 것도 나의 확신이다. 나도 이러한 것을 느끼고 감지한다. 그러나 그 기운을 너무 남용하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된다고 믿는 다.

나는 우리 집에 오시는 분들에게 웃으면서 질책한다.

“귀신이 시키는 대로 다하면 미친 사람 밖에 더 되겠어요? 신의 세계나 인간의 세계나 순리는 똑같아요. 이겨 낼 것은 이겨내야지요.”

물론 내가 신의 세계를 내 몸으로, 내 의식으로 모두 깨달아서 하는 이야기는 분명 아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들려주는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는 나를 보고 ‘이상한 무당이 다 있네’ 하고는 등을 돌리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기가 죽을 내가 아니다. 그저 현실을 직시 하지도 않고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는 이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상황을  남의 탓으로 돌리기 좋아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귀신에게까지 탓을 하는 것도 재미  있는 공통점을 갖고 있기도 하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교과서적인 말이지만 우리 모두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면서 마음을 먹은 대로 행동을 옮기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말은 사람의 의지는 심약한 반면 또 아주 강하기 때문에 생겨 난 말이라고 해석한다. 그 의지를 강하게 할 방법을 제시하는 것도 무당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무당이 그러기 위해서는 상담을 하러 오신 분의 심연 속의 문제 거리를 끄집어 내주어야한다. 심연속의 문제 거리를 토해낼 수 있게 대화를 이끌어 나가자면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 신뢰는 바로 무당이 모신 신명인 것이다. 

상담하러 온 분의 얘기를 한참 듣다보면 문제의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 실마리는 현실 속에서의 얽힘일 수도 있고 귀신과의 얽힘일 수도 있다. 그렇게 해서 현실에서의 길을 찾기도 하고 굿이나 기도 정성을 드려서 해결방법을 찾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게 인연을 맺으면 반드시 상담하러 오신 분과의 좋은 결과를 이뤄낼 수가 있다.

무당과의 대화를 통해서 천군만마를 얻은 듯 밝은 모습으로 내 집을 나선 분들이 모든 것이 수월하게 풀려가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올 때면 무당으로서의 보람이 크다.

무당이 어느 굿이든 혼신의 힘을 다하듯이 다른 이의 이야기도 혼신의 힘을 다해 들으면서 그 이야기 속으로 동화되어야 한다는 것이 내 변함없는 소신이다. 분명 그렇게 나누는 이야기는 대부분이 넋두리다. 그러나 넋두리 속에는 분명 정답이 있다. 그것은 내 신명이 내게  남의 얘기를 집중해서 들어줄 수 있는 능력을 주셨기에  터득하게 된 것이기도 하다.

내게는 작다면 작고 크다면 아주 커다란 소망이 있다. 서울을 비롯해서 크고 작은 도시 중심가에 성스럽고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곳...속세의 물질적 집착을 거둬내는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하는 곳... 성당이나 교회처럼 크고 화려하지는 않아도 누구라도 편안하게 찾아오는 소담한 곳...그런 넋두리의 집을 지을 것이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어느 누구라도 언제라도 편안하게 넋두리를 할 수 있는 집말이다. 그 안에서 답답하고 속상하고 말하기 어렵고 그래서 꽁꽁 묶어놓았던, 그 모든 넋두리를 늘어놓을 수 있는 그런 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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