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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자동차

담박제 2004. 4. 23. 02:38
 

불타는 자동차

상담을 나누다 보면 황당한 경우도 많다. 저마다 답답해서 찾아오는 줄은 알면서도 정말 어이없는 궁금증을 안고 오는 이들을 보면 내심 어이가 없다. 측은해지기도 한다. 저토록 나약한 마음으로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하는 걱정이 든다.

지금껏 내가 제일 황당하게 기억하는 질문 중에 하나는 운전면허 시험에 관한 것이다. 초창기 나이가 꽤 든 분 들이나 공부와 연결 짓기가  전혀 상상이 되지 않는 젊은 아가씨들이 혹 시험 운이 있겠는가를 물어온다. 어떤 아주머니는 수줍은 듯이 묻기도 한다. 그럴 때면 나는 머리 속이 혼란스러워지기도 했다. 대학입시도 아니요, 취직 시험도 아니요,  고시도 아닌데 이 사람이 무슨 시험을 물어 보는 걸까...나는 고개를 갸우뚱 거리곤 했다. 나는 되묻기를 한다. 

“무슨 시험이요? 혹 자녀분이 대학을 가나요?”

어떤 이는 되려 눈을 크게 뜨고 ‘아니 그런 것도 못 맞추느냐’고 큰소리로 나무라면서 ‘내가 내일 운전면허 필기시험을 보러 가는 데, 붙을 수 있나 없나 신령님께 물어 봐달라’고 하는 것이다. 운전을 해도 되겠는지 아닌지도 물어봐 달라고 덧붙이기도 한다. 차를 사도 되겠나,안되겠나? 운전을 해도 사고를 내지 않겠나? 어쩌겠나?... 동시 다발적으로 물어 오는 것이였다. 처음에는 ‘아, 이런 것도 알아 맞추어야 하는 것이 무당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질문에 속시원히 대답을 못하고 어리벙벙한 내가 부끄럽기도 했다.

시험을 보러 가는 날의 일진이 좋은가 나쁜가를 봐주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모두들 단호하게 시험에 붙을 수 있는지 없는지 하는 대답을 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로서는 대답하기 모호한 것들이었다. 운전이란 것은 생활에 편리하고 유익한 수단이 되기도 하지만 살아가면서 수가 나쁘다 보면 운전을 하다가 실수로 사람을 다치게 할 수도 있고 그로 인해서 곤욕을 치르기도 하니 억지로 꿰어 맞추어 생각을 하면 운전을 해도 될 사람과 해서는 안 될 사람을 분별해서 가르쳐 주는 것도 무당의 할 일이라면 할 일일 것이다. 현시점에서 비행기 조종사가 특별하게 여겨지듯이 운전도 그 옛날의 관점으로 보자면 직업으로는  최고의 기술로 꼽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편리한 생활의 한 방편일 뿐이다. 그러나 필수적이란 점도 부인할 수가 없다. 운전면허가 없는 사람을 천연 기념물이라고도 부르는 세상이 되었으니까...

세상이 하도 복잡해지고 사는 방식이 여러 가지로 다양해 지다보니 이젠 신들도 참으로 여러가지를 보살펴야만 신으로서 대접을 받을 수 있겠다 하는 생각에 혼자 웃기도 한다. 반면에 무당들도 다방면으로 유능해지지 않으면 안되는 현실임을 깨닫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도 나는 절대 신령님이 운전 면허 시험의 합격여부를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대부분의 무당들이나 보살님들은 아주 당당하게 “합격해!” “아냐, 떨어져!”라고  운전면허 시험을 예언하며 영검함을 자랑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기술이든 필요에 의해서 배우는 것은 자기의 노력이 있어야만 성취될 뿐이다. 운전은 적성에 맞아야 한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적성에 맞아야 하는 것이 어디 운전 뿐이겠는가. 세상만사 모든 것이 그렇지 않은가.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나 역시 막상 운전면허 시험을 치르게 되자 상담하러 왔던 분들이 내게 물었던 심정이 이해되긴 했다.

운전면허를 따야겠다는 생각은 있었어도 실행하기가 참 힘들었다. 겁이 많기도 했고 시간상 여유도  없었다. 하루 다부지게 마음을 먹고 필기시험 날짜를 잡았다. 필기시험쯤이야  문제없겠지 하는 마음으로 시험 날짜 사흘을 앞두고 문제지를 몇 번 훑어본 뒤에 면허 시험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막상 시험장을 향하는 내 생각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시험이란 단어에 심리적으로 주눅 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시험을 치른 것이 언제쯤이었던가. 거의 이십여년이 가까웠다. 공부 못하는 아이들이 평소에는 호시탐탐 딴청 피우다가 시험 기간에 들어서면 밤을 지새우며 시험 공부를 하듯이 나 역시도 학생시절에 시험이란 단어가 늘 부담을 주었던 것 같다. 모범생과는 거리가 멀었으니 자연, 시험이란 것에 익숙치 않았다. 

시험장으로 들어서면서 그까짓거, 뭐 그리 어렵겠는가 ...  주눅들지 말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런데 사십의 나이를 바라보면서 수험표를 받아들고 책상 앞에 앉아 있다보니 가슴이 떨리고 심장이 두근대기까지 한다.  싸인 펜을 든 손은 벌벌 떨리기까지 했다. 침착해지려고 노력을 하면 할수록 더 떨리는 것이었다.

시험장에서 나오면서 내 자신이 우스웠다. 어쩜 떨려도 그렇게 떨릴까...그리곤 그날 보기 좋게 낙방했다. 두 번째로 응시한 필기시험에 합격을 하는 순간, 나 원 참. 장원급제라도 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혼자 또 웃었다.

신문을 보면 나이 들어서 공부를 시작해서 예비고사에 합격을 했다든가 검정고시에 합격을 한 이웃들이 있다. 그럴 수도 있지 뭐...하고 흘려보냈지만, 그들이 그렇게 대단하고 존경스럽기까지 느껴지게 된 것은 오로지 운전면허의 필기시험 덕택이었다.

그런  필기시험을 무려 3년 동안 모두 네 번을 치러야 했다. 필기시험에 합격을 하고도 1년 안에 실기시험을 치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기 시험을 잡은 날에 굿 날이 잡히거나 신어머니의 공연이 잡히면 시험은 날려 보내야 했다. 연습을 단 한번도 제대로 할 수 없던 때도 있었다. 도무지 운전면허 학원에 등록을 하고 실기 연습을 하러 가면 가는 날로 교습 강사들의 행동이 못마땅해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때도 있었다. 그렇게 3년이 흘러갔다.

운전면허를 따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지 3년째 되는 어느 날, 시효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자 마음이 다급해졌다. 이번에 유효기간이 사라지면 또다시 그 지긋지긋한 필기시험을 봐야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었다. 불법 교습소에서  운전연습을 했고 부랴부랴 실기 시험을 치렀다. 코스에 합격을 했지만 당연히 주행에서 보기 좋게 떨어져 버렸다  그 무렵 운전면허  행정이 바뀌기 얼마 전이었다. 전국 어디서나 시험 보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전남 벌교의 시험날짜가 가장 빠르다는 정보를 얻었다. 그 무렵  낳은 지 세 달이 된 하늘이라는 이름을 갖은 강아지를  키우고 있었다.   집에 혼자 놔둘수가 없어 강아지 까지 차에 태우고는 내차를 운전 하는 아이와 함께 벌교에 도착을 했다.  다시 벌교에서 운전면허 학원에 등록을 한 뒤 나와 똑같은 케이스로 부산에서 온 가정주부와 함께 주행시험에 합격을 하기위해 필사의 노력을 다 했다. 부산에서 온 그 주부는 운전면허 때문에 남편에게 온갖 구박을 다 받은 모양이다. 이번에는 무슨 수로든 면허를 따야한다며 운전면허에 아주 목숨을 건 사람처럼 보였다. 그 주부와 면허 얘기를 하다보면 웃음이 절로 나왔다.

우리의 필사의 노력은 이러했다. 운전 연습에 필사의 노력을 다한 것이 아니었다. 어이없게도 학원 강사를 매수하는 일에 필사의 노력을 다한 것이다. 부산의 주부와 나는 학원에서 정해진 연습량을 채우면서 실력행사를 할 수 있는 강사가 누군지를 호시탐탐 염탐했다. 그러나 굳이 염탐이 필요 없었다. 아주 재미있으면서도 괴팍스럽게 생긴 우리담당 강사가 제격이었다.  시간만 나면 그 강사는 자기 말만 잘 들으면 무리 없이 합격할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다. 그 강사는 내가 데리고 간 강아지 덕분에 쉽사리 친해 질수 있었다. 강아지를 굉장히 좋아 하는 것 이였다. 결국 우리 둘은 오직 그 강사에 말을 따르기로 결정을 했고 그 강사가 원하는 대로 저녁과 술을 대접했다 술을 대접하면서 기쁨조가 되어 강사의 치근덕거림을 다행 이 내차를 운전하던 아이 때문에 피 할 수 있었다.  이튿날 아침 그 강사의 빽 으로 미리 주행코스를 한바퀴 돌 수 있는 기회까지 얻었다. 결국 그 필사의 노력은 성공했다. 우린 운전면허를 가슴에 품에 안을 수 있었다.

처음 운전면허를 따야겠다고 생각했을 때의 내 주변 환경과 3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면허를 딴 뒤의 내 주변 환경은 많이 바뀌어져 있었다. 여러 가지로 심신이 고달플 때였다. 그 당시  무당으로서 현실과 초자연적인 세계를 오가며 살기에는 너무나 역부족인 면이 많았다. 이러 저러한 것들로 인해 삶에 환멸을 느끼기도 했고, 사람들과의 인연과 관계에서 매우 혼란스러움과 갈등 속에 빠져 모든 것을 자포자기하기도 했다.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 에너지를 소진 된 상태였다. 무당으로서의 삶을 살기보다는 그저 보통사람처럼  살고 싶기도 했다. 그런 시기에 나는 또 다른 돌파구를 찾았던 것이다. 내 방랑벽이 운전면허와는 딱 들어맞는 것이었다. 면허를 손에 쥐자마자 나는 단 하루의 연수도 받지 않고 차를 몰기 시작했다. 한밤중에 차가 없을 때쯤 시작해서 날이 훤히 밝아오는 새벽까지 서울 근교 국도를 마냥 헤매고 다녔다. 운전에 조금씩 조금씩 자신이 붙자 산기도를 핑계삼아 전국을 돌아다녔다. 당시로서는 퍽 괜찮은 현실 도피였다. 그 해에 내가 운전한 거리는 6만 킬로미터를 훨씬 넘어 있었다. 그것이 그렇게 굉장한 거리라는 것을 몰랐을 뿐이다. 지금도 나는 일년에 4만에서 6만 킬로미터를 운전 한다. 운전을 하면서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다. 그러나 운전과 함께한 그 우여곡절 속에서 심신이 지친 나를 바로 세울 수 있었다.

운전을 하기 시작한지 꼭 13개월이 됐을 때다. 그 무렵 내 상황은 버겁고 고달픈 생활의 연속이었다. 물론 내가 잘못 판단해서 이루어진 일들이었다. 갈등과 혼란 속에서 모든 것을 자포자기한 듯 여겨졌지만, 자포자기는 생에 대한 강한 욕구와 내 끈질긴 근성을 한층 더 강화시키는 것이기도 했다. 그 날도 내가 맺은 주위 인간관계의 채권 채무의 연결고리 속에서 상대방에게 인성을 말살시키는 것 같은 모욕적인 언사를 들어야 했다. 몹시 속이 상해 그 길로 일월산을 향해 달렸다. 정신은 혼란스러웠고 그럴 때일수록 나를 찾아와 상담을 의뢰하는 분들과는 마주 대할 수 없었다. 나도 모르게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새벽 2시 반이 넘은 시각. 산길로 이어진 국도에는 오가는 차도 없다시피 했고 어둠이 내린 도로를 달리는 동안 모두가 잠들어 있는데 나만 깨어 있다는 환상에 젖어 들었다. 그 환상은 나를 너무도 외롭고 서글프게 했다. 경북 봉화군 청기면 단동으로 들어서는 길에 갑자기 머리끝이 쭈빗 하면서  뭔가가 앞에 있다는 것을 느꼈다. 무조건 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다급한 마음에 브레이크가 아닌 액셀레터를 내리 밟고 말았다. 사고라는 생각과 동시에 이젠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에 스치는듯 하면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마음이 편하다... 머릿속에 오색 영롱한 색깔들이 겹쳐졌다... 누군가가 나를 잡아 흔드는 것 같다... 몸이 불편하다는 것이 느껴진다... 눈을 떠봐야겠다 라고 마음먹자 눈이 떠진다...

눈을 떠보니 분명 차안인 것 같지만 차안 구조가 낯설다. 내가 살아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느껴진다. 죽은 것은 아니구나, 그래 살아 있다면 정신을 차려야지...정신을 가다듬는다. 그렇구나, 대형사고를 냈구나... 불편한 몸을 추슬러  보자... 순간 별의별 생각이 다 떠오른다.  아뿔사! 나는 거꾸로 쳐박혀 있었다. 벌벌벌... 몸이 떨려온다. 가슴이 두근거려서 숨을 쉬기에도 곤란할 정도다. 간신히 몸을 움직여 바로 앉고 보니 거꾸로 박힌 차 천장 위에 앉아있는 것이었다.

그래 살았다면 차안에서 빠져나가야 하는 데... 어디로 나가야 하나... 차 문을 열어야지... 그러나 그 깊은 밤, 암흑같은 곳에서 어디가 문인지 알 수가 없다. 난...정신력으로 살아온 사람이야... 정신을 차리고 문을 열어야만 해...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어... 그 와중에도 나는 또 내 자신에게 세뇌를 시킨다. 

그러나 문을 열리지 않는다. 힘없이 발로 걷어차 본다. 벌벌 떨리는 몸에서 무슨 기운으로 발길질을 했는지 모르겠다. 지금 생각하면 아마도 그냥 갖다 대는 정도였을 것이다. 문은 열리지 않는다. 꼼짝 없이 갇혔구나..그러나 포기해서는 안돼...꼭 나갈 방도를 찾아야해...마음을 차분히 가라 앉히고 살펴보자... 그러나 마음과 달리 겁이 나면서 몸은 더 떨려 오고 있었다. 그때 시야에 뭔가 너덜거리는 것이 잡힌다. 조수석 창문이 거미줄처럼 선을 그은 채 아주 조그마한 틈을 보이면서 너덜거리고 있었다. 그래, 저곳으로 나가면 되겠구나. 나는 몸을 움직였다. 내 몸집이 작은 것이 다행이다 싶다. 창문의 작은 틈으로 기어 나온 나는  내 차의 광경을 보고 일어설 수가 없었다. 기름 냄새가 진동을 했고 이미 차는 뒤집혀진 채로 불에 타고 있었다. 그 안에서는 불이 난 줄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불을 꺼야 한다는 생각에 없는 힘을 다해 벌떡 일어나 입고 있던 웃옷을 벗어 내던져 황급히 불을 끄려 했다. 하지만 옷이 일으키는 바람에 불은 더 거세게 타오른다. 발을 동동 구르는 수밖에 없었다. 119에 신고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그때서야 들었다. 핸드폰을 찾아야 했다.  다행히 빠져 나온 곳에는 아직 불길이 닿지 않으니 시도라도 해봐야 할 것 같았다.

용기를 내어 다시 차안으로 기어 들어가 핸드폰을 찾아 나왔다. 그러나 어렵게 찾은 핸드폰은 산속에서 제 할 일을 못하는 것이었다. 통화 불가능 표시만 떴다. 기가 막혔다. 그 순간 담배가 피고 싶다. 담배의 강한 욕구가 나를 다시 차안으로 향하게 했다. 불길 속에서 담배를 찾을 생각을 했으니...담배를 찾아 입에 무는 순간 마음이 다소 진정이 된다. 벌벌 떨리던 몸도 진정이 된다. 그때서야 가방부터 꺼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다시 차안으로 몸을 숙였다.  다행히 가방 끈이 눈에 들어온다. 끈을 잡아 끌어 냈다. 그러나 이미 차가 굴러 내릴 때 가방 속의 소지품은 다 떨어져버렸던 것이다. 일월산을 향하는 국도는 단양에 들어서면서부터  곳곳에 검문이 심하다. 죽령 재를 넘어 오면 검문소가 있고 영주에서 봉화로 가는 길에도 검문이 있다. 유난히 그 길은 검문이 많은 곳이라 검문할 때마다 면허증을 꺼내기 귀찮아 아예 가방을 열어 둔 상태였다. 그러고 보니 이미 가방 속에 중요한 것은 다 빠져나갔던 것이다. 다시 차안을 들어 갈 용기는 더 이상 생기지 않았다. 불길에 쌓인 차만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지나는 차라고는 하나도 없다. 뭔가 조치를 해야 했다. 오던 길을 되돌아 걷기 시작했다. 여러 차례 그곳을 오고갔던 곳이라서 그 길이 훤했다. 한 1킬로미터쯤 걸어가면 마을이 있다는 것이 떠오른 것이다. 물론  불타는 차를 지나면 더 가까운 거리에 마을이 있었다. 그렇지만 홍콩영화가 머릿속에 스치면서 도저히 내 차를 지나갈 수가 없었다. 2차선의 좁은 국도에 차가 길게 가로막혀 불에 타고 있었다. 한순간 불길 속에서 차가 터지면서 허공으로 산산이 부서져 날아가는 장면이 상상이 되자 차를 지날 수 없었다. 더구나 나는 머릿속으로 홍콩 비디오를 한편 찍고 있었다.

불길 속에서 차 뚜껑이 날아간다. 차 문이 높이 날다가 내 머리위로 떨어진다...이 대목에서 나는 몸을 돌려 반대편으로 힘껏 뛰기 시작했다. 차에서 될수록 멀리 떨어져야 한다... 어차피 민가를 찾아야 하지 않는가.

민가를 찾아 문을 두드렸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하긴 이 산골마을에 그것도 꼭두새벽에 여자가 도와달라고 사정을 하면서 문을 두드리니 쉽게 열어 줄 리 없었다. 그러나 목소리가 다급하고 애처로웠는지 할머니 한 분이 나오신다. 할머니 차에 불이 났어요... 119에 신고를 해야 해요. 전화 좀 쓰게 해주세요...

간청을 하자 얼떨떨하게 여기던 할머니는 사태를 짐작 했는지 전화기를 방에서 끌어 내주셨다. 119에 신고를 했다.

나를 바라보던 할머니가 “어휴, 저 피 좀  보게 많이 다쳤나본데 어찌 걸어 왔냐”고 묻는다.

그제서야 나는 어디서 피가 나요? 하고 되려 묻는다  “그 팔 말이유...어디 좀 봅시다” 하고 할머니는 내팔을 잡으신다. 팔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어디가 아픈지, 어디가 찢어졌는지 내 몸을 살필 여유도 없었던 것이다. 살펴보니 별 것 아닌 것 같다. 아마도 차안에서 기어 나오다가 차 유리에 긁힌 것 같다. 

“할머니 별거 아니네요. 감사합니다 신고를 했으니 차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겠어요.” 라고 말하자 할머니는 그 몸으로 어디를  가느냐고 소방차가 오지 않겠느냐면서 나를 만류한다. 그러나 나는 차가 있는 곳으로 가야 했다. 그 차는 몇년동안 내 분신이나 다름이 없었다.  더군다나 일년동안은 그 차와 나는 호흡을 같이 했다고도 할 수 있었다. 그 차는 유일한 내 피난처였다. 그렇게 내게 큰 비중을 차지하는 내 차가 불길 속에 휩싸여 있는 것이다. 어떤 힘으로 그 상황에서 길을 걸어갔다가 걸어왔는지는 지금 돌이켜 생각해봐도 잘 모르겠다. 불타는 차가 있는 곳으로 돌아와 길위에 쓰러져 버렸다.

뽀까 뽀까 소리에 정신이 든다. 오토바이를 탄 경찰관은 무전을 치고 있었다.

“운전자 사망으로 추정됨.”  그 소리에 나는 어이가 없다. 나는 죽었던 것이다. 사실 누구 봐도 살아 나올 가능성은 전혀 없던 상황이었다. 가로등도 없는 국도는 어두웠고  쓰러져 있는 나를 발견을 못한 것이다. 혼신의 힘을 다해 일어서려고 했으나 기운이 없고 몸은 아까보다 더 떨려 온다. 

“아저씨 내가 운전했어요!”  내 목소리를 못 들었는지 여전히 무전기를 들고 사고 신고를 하고 있다. 하는 수없이 속으로 “나는 강한 사람이야!” 라고 외치며 오토바이를 향해 앞으로  앞으로 기기 시작했다. 잠시후 경찰관은 나를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이다. 나를 부축하며 묻는다.

“아주머니가 운전을 하셨어요? 같이 탄 사람은 어디 있나요?.”   

“아뇨, 저 혼자에요.”

그때서야 다친 곳은 없나 나를 이리 저리 살피고 구급차를 부른다. 지나가는  트럭이 차를 세웠다. 트럭 운전수는 상황을 살피더니 나를 보고 “아주머니 용꿈 꾸었네요” 라며 혀를 찬다. 산골이라 구급차를 부르기에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말을 듣고 나는 트럭아저씨의 도움 으로 근처 민가로 옮겨졌다. 

내 흰차와의 인연은 그것으로 끝이 났다. 내가 백마로 부르던 내차는 그날 새벽 세시부터 아침 여덟시까지 그냥 타오르고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상태로 영양의 페차장에 버려졌다. 나는 이후로 열흘동안 앓아 누웠다. 신기할 정도로 당시 나는 다친 곳이 전혀 없다. 단지 놀랐을 뿐이다. 그렇게 나는 다시 한번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기적으로 생의 길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나는 평상시 안전벨트를 안 매고 운전을 한다. 웬지 안전밸트가 부담스러웠다.   그 날의 사고는 안전벨트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 몸이 자유롭게 차와 함께 굴러서 다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렇게 나는 다시 한번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천지신명의 보살핌으로 생의 길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이  무당으로서의 삶의 과정이라는 것을 깨닫기도 했다. 나는 교통사고의 경험으로 마치 뱀이 허물을 벗듯이 또 한 겹을 벗어 버렸다. 그것이 내게 주는 의미는 아주 소중하다. 진정 천지신명이 나를 택했을 때 무당으로서 무엇인가 주어진 몫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사고였다.

그리고 그 후 열흘 뒤에 또 다른 차와 인연을 맺었고 지금도 나는 여전히 차를 주야로 몰고 다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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