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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속의 무당

담박제 2004. 4. 23. 02:21
 


          인터넷속의 무당


  접신이 되어  무당의 길로 들어서면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퍼져간다. 그 소문을 들은 이들이 무꾸리를 하러 찾아오는 시절이 있었다. 찾아오기 쉽게 하기위한 뜻도 있지만 신이 머무르시는 곳 이란 의미의 징표로 신당에 깃대를 달기도 했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 속에 이제는 무당들에게도 마케팅의 시대가 도래 한 것으로 보인다. 광고와 공연을 통해서 알리는 방법 외에 인터넷 이란 매개체를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면서 본격적인 영업이 시작되었다.

  적극적인 광고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자기의 존재를 알려서 한 명이라도 더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취지에서 라고 한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면 말인즉슨 맞는 말이다. 이제는 일간지, 월간지등 광고의 상당부분이 무당이나 점쟁이의 광고로 채워지고 있다. 일간지에 끼어 들어있는 속지 광고도 상당한 양이다. 나도 광고라는 유혹을 뿌리치기가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 정서에는 맞지 않았기 때문에 쉽게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

  우연히 공연을 시작하여 관객들과의 소통이 되기 시작한 해에, 컴퓨터 사업을 하는 젊은 청년과의 인연이 있었다. 하루는 그 청년이 내게 공연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계시는데 홈페이지를 만들어 보는 것이 어떠냐고 권유 한다. 웬 홈페이지 ? 무당이 웬 컴퓨터?  신비로운 우주조차 과학이라는 이름 앞에 발가벗기어지는 세상이다. 그러나 무당은 지나간 수백 수천 년의 세월과 현시대를 공유하고 살아간다.

  어쩌면 무당은 구닥다리의 산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 무당에게 최첨단의 컴퓨터와 인연을 맺는 것은 우습게 여겨졌다. 인터넷이 우리사회에 이토록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줄 몰랐을 때였다. 홈페이지의 역할에 관한 이해가 드물던 시절이니 나는 귀담아 듣지 않고 사양했다. 그 청년과  이야기가 오고간 며칠 후  둘째 언니가 우리 집에 다니러 왔다 언니는 오랜 직장생활 탓으로 컴퓨터에 익숙한 사람 이였다 언니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직장에서 의 인터넷에 관한 얘기를 하는 것 이였다. 얘기를 듣다보니 아주 재미있는 것 같았다. 홈페이지의 개념도 나를 잡아 이끌었다. 나는 그 며칠 뒤에 바로 컴퓨터를 장만을 했다 간단하게 조작하는 법부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 안에는 또 다른 세상이 존재하고 있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생각을 고쳐먹었다. 내 뜻을 펼칠 수 있는 곳이 그곳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인터넷 정보의 바다 속으로 젊고 생각 많은 이웃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네티즌들의 정보교환은 상상을 초월했다. 검색을 해보니 이미 몇몇 무당들의 홈페이지도 만들어져 있었다. 며칠동안 컴퓨터 앞에서 탐색에 몰두했다. 특히 홈페이지의 게시판은 소통이라는 아주 훌륭한 매개체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그동안 내가 꿈꿔왔던 대화를 젊은이들과 나눌 수 있다면, 무당에 관한 고정관념도 그릇된 인식도 조금은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에게 무당이란 이런 존재다, 하고 외칠 수 있었고 인터넷으로 무료상담을 해 줄 수 있겠다는 판단도 섰다. 그것은 상상만으로도 아주 재미있는 일이었다.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장애가 있었다. 홈페이지를 만드는 비용이 생각보다 많이 든 것이었다. 내가 홈페이지를 만들려는 시기는 벌써 무당이나 점쟁이 들을 상대로 광고 효과를 권유하며 홈페이지를 만드는 사업이 번져가던 풍토였던 것이다. 상술이 앞선 방식의 홈페이지를 갖고 싶지는 않았다. 고심하던 중에 전통문화의 핵심을 찾아서 인터넷 사업을 시작한 분하고 인연이 됐다. 그분과의  디지털 문화의 흐름에 관해 대화를 나누던 중에 내 뜻을 이야기 하자, 그분은 그런 홈페이지라면 비용을 받지 않겠다며 홈페이지를 멋지게 만들어주셨다.

그러나 사이버 테러라는 것이 얼마나 가슴을 멍들게 하는 것인가를 안 것은 일년 반이 지나서였다. 이후로 나는 인터넷의 환상을 깨고 말았다.


  홈페이지가 만들어지면서 나는 인터넷과 본격적인 씨름을 하게 되었다. 일년 반 가까이 게시판에 매달렸다. 밤새워 리플을 달았고 내 리플에 힘을 입어 밝은 생활을 하게 됐다는 사연이 늘어났다. 그런 사연들을 읽으면 힘이 났다. 보람도 느끼고 행복감에 젖기도 했다.

  어린 중학생들이 무당이 무서운 사람이 아니라 따뜻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는 글을 올리기도 했고, 사진작가가 되고 싶어 입시 준비하는 입시생의 사연을 읽고는 내가 주관하는 굿 사진을 찍게 하여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기도 했다. 고부간의 갈등, 부부간의 갈등, 연인 사이의 구구절절한 사연까지 내 홈페이지 게시판을 채웠다. 예쁘고도 아름다운 사연 에서부터 일상생활에 자지구레한일들 이며, 살면서 이런 일이 있을까 싶을 정도의 사연까지 넘쳐났다. 자연히 내 홈페이지는 연령을 초월하고 남녀의 구별 없이 모두가 가슴속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공유하는 공간으로 사랑받았다.

  욕심이 생겼다. 넋두리 게시판을 별도로 만들었다. 살아가면서 얻은 경험과 지혜, 또한 여러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사연들, 미처 예상치 못한 일에 부딪혀서 갈팡질팡할 때, 외롭고 힘이 들어 누군가가 절실히 필요하지만 아무도 없을 때, 그럴 때 넋두리 게시판을 찾아 의지할 수 있는 공간으로 발전 되어 나누는 즐거움, 그 넉넉함을 서로가 즐기며 공감할 수 있는 그런 곳 이 되어가고 있었다. 한참 재미를 붙였고 한발 더 나아가 카페를 만들기도 했다. 인터넷 사이트마다 커뮤니티가 존재한다.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끼리 방을 만들고 글을 올리거나 대화 방에서 익명으로 또는 실명으로 대화를 나눈다. 무당으로서는 그 시작을 내가 처음 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전혀 뜻밖의 사건이 생겨버렸다.

  갓 신 내림을 받은 아이들의 글로 인해서 시작된 일이었다. 내 가까이 있는 이에게서 비방의 글이 올라오기 시작하자, 같은 계통의 사람들까지 발 벗고 나서서 온갖 비방의 글들로 도배를 하기 시작했다. 단 한번도 예견한 적이 없는 일들이 생겨난 것이다. 대책이 없었다. 속수무책으로 도마 위에 올라 난도질을 당하는 상황이었다. 비방의 글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마음을 나눴던 이들로부터 상처를 받는 것이 견딜 수 없었다. 나와 같은 계통의 일을 하는 몇몇 사람들은 자기네들의 잣대로 사람을 몰아가기도 했다. 종교적 제의를 주관하는 사제 일수도 있지만, 남이 자그마한 잘못을 하면 감싸기보다는 파헤쳐내야 속이 풀리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험을 들춰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고 남이 잘되는 꼴은 죽어도 못 보는 것이다. 어는 종교든 어느 계통이든 그런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지만....

   한순간에 나는 인터넷을 이용해 사기를 치고 떼돈을 번 사기꾼으로 몰렸다. 일년 반 세월동안 소중하게 나눴던 사연들이 몰지각한 이들의 언어폭력, 그들의 무차별적인 사이버 공격에 무참히 깨어지고 말았다.

  얼마 전 국내 작가 홈페이지 중에서 최대 방문객 숫자를 기록하는 소설가 이외수 선생이 홈페이지의 방명록이 잠정적으로 폐쇄된 일이 있었다. 그 소식을 접하면서 난 그때의 상처가 되살아났다. 오직 유명해지고 싶어서 시작했다는 인신공격에 이외수 선생은 점잖게 시 한수로 막았지만, 끝내 말 안 되는 험담으로 가득 메워진 방명록은 폐쇄라는 극한적인 처방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 두 사람의 글로 인해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까지 벌 떼처럼 일어나서 한패가 되어버리는 것은 그대로가 테러였다. 이외수 선생은 다시 방명록을 개설하셨지만, 나는 인연의 고리란 함부로 맺어서는 안 되는 것임을 교훈처럼 안고 홈페이지의 문을 닫아걸었다. 그 정도에 흔들리지 말라는 얘기도 숱하게 들었지만 모든 것이 내 탓으로 여겨졌다.

  마음을 나눌 수 없다는 것은 삭막한 일이다. 사람이 사람을 믿지 못하는 것은 죄악이라고 여겨온 내 사고에 일대 혼란이 오기도 했다. 나는 다시 내가 살아가는 방식의 정리가 필요했다. 무당으로서 내 삶을 반추하며 반성의 시기로 삼기로 작정을 했다. 홈페이지의 문을 굳게 닫고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인도로 떠났다. 남들이 볼 때에는 분명 도피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도피는 내가  불길 속에서 살아나 한 겁을 벗은 듯이 또 한 겁을 벗는 계기가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인터넷상에   내 카페가 사라지면서  인터넷에는 우후죽순처럼 무당들의 홈페이지가 생겨났다. 노골적인 장사 속으로 만들어진 것들도 태반이다. 간혹 무속인 카페에서 문제가 생기면 카페 주인이나 회원들이 내게 찾아와 하소연을 하거나 문제해결을 위해 도움을 요청한 일들도 있었다. 처음 시작을 한 나에게 책임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 거절을 못 했다. 카페 안에서 무당들의 망신을 줄일 수 있다면 당연히 나서야 하는 것도 기실 내 할 일인 것 같아서였다.

  동호회나 동아리처럼 움직여지는 카페라면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무당의 카페는 다르다. 종교적인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무교에서는 무꾸리가 행해지고 무꾸리는 굿으로 이어 진다. 상업성을 배제 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안에서도 아귀다툼이 일어난다. 무당도 시대에 맞추어 변해 갈 수는 있다고 생각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당의 정체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가끔은 예전에 좋았던 기억을 더듬으며 인터넷에 들어가 네티즌이 올려놓은 글들을 읽어본다. 글은 점점 요지경속으로 흘러간다. 말 안 되는 이론이 적당히 포장돼 마치 해박한 듯 펼쳐지기도 한다. 무교에 대한 생각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인터넷 속에는 선무당이 너무 많은 것 같다. 그것도 시대의 흐름 에 따른 현상일까? 그러나 나는 눈팅만 한다.    그런 글 들을 읽을 때마다 나는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이다.

‘신의 세계나 토속신앙인 무교는 이론으로는 절대 이해 할 수 없지 않을 까요?’ 라는 내 생각의 리플을 달지도 못한다.  나는 그렇게 해박하지도 않고 대책 없이 홈페이지를 만들고 카페를  만들어놓고 내 의도와 취지를 알리지도 못하고 사라졌으므로...

  인터넷이 나라를 움직이기도 한다. 월드컵 때의 수많은 군중들의 모습이 그러했고, 인터넷에서 촉발된 내용이 촛불시위로 번져서 시민들의 열기로 이어지면서 무서운 힘을 발휘하고 있지 않는가. 긍정적인 시각으로 보면 아주 좋은 현상이다. 익명으로 올리는 글을 읽고 용기가 생겨서 더 진솔한 글을 올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야비하고 비굴한 글들을 읽고 동요되어 재미 삼아 돌팔매질을 가하는 게시판을 마주할 때면 나는 쓴웃음을 짓는다.

프랑스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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