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의소리 ,몸의소리본문중에서

떠도는 혼령

담박제 2004. 4. 20. 01:41
 

    떠도는 혼령

 

  끔찍할 정도의 학교생활 에서 음악은 내 유일한 친구가 되었다. 약수동 산동네의 큰집에 잠시 맡겨져 있을 때 큰집의 큰언니는 고등학생 교복을 입고 학교에서 돌아와서는  아버지와 함께 라디오를 듣곤 했다. 그 라디오에서는 쏼라 쏼라 하는 알아들을 수 없는 미국말과 함께 음악이 나왔다. 그 음악을 조용히 따라 부르는 큰집의 큰언니가 신기하기도하고 부럽기도 했다. 그것이 나와 음악의 첫 인연이다. 나도 언젠가는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을 들어야지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하면 마음이 설레었다.

  우리 둘째 언니가 중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우리 집에 라디오가 생겼다. 언니는 라디오에서 나오던 독특한 팝송을  따라 부르곤 했다. 내 어린 가슴을 설레게 만든 그 노래가 바로 애니멀스(The Animals)의 <해뜨는 집(House of the Rising Sun)> 란 것을 알게 된 것은 나중에 내가 중학교에 입학한 후였다. 또 그러한 종류의 노래가 나오는 방송이  A. F. K. N이란 것도 알고 나서는 집에 있는 라디오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식구들의 눈치를 보며 훔친 듯이 라디오를 부여잡고 알아들을 수 없는 영어와 호기심을 자극하는 노래가 나오는 그 방송국에서 원하는 노래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처음에는 오로지 <해뜨는 집>만 나오길 기다리기도 했지만, 이후로는 그 방송을 통해 정말 많은 음악들을 좋아하기에 이른다. 또한 지금 잘 기억이 안 나지만 피세영이나 최동욱 인가하는 사람이 진행하던 방송도 어떻게 해서든지 들으려 애를 썼다.

  이렇듯 음악에 갈증을 갖고 있던 터에 선생님에 의한 상처를 본격적인 음악수업으로 치유하게 된 것은 분식센터를 통해서였다. 당시 분식을 장려하면서 곳곳에 대형 분식센터가 생겨났다. 퇴계로 진양상가에 한곳, 을지로 삼풍상가에 한 곳, 이름이 기억되는 곳으로 종로의 대림분식센터 등이 생겼는데, 그곳에는 99원짜리 돈가스가 최고의 음식이었다. 이곳 디제이 박스에는 머리를 길게 기른, 모두가 판돌이라고 불렀던 디제이 아저씨가 꿈에도 그리던 팝송을 멋진 멘트와 함께 틀어 주었다. 그곳은 말할 것 없이 내 본거지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가난했던 집 형편 때문에 나는 슬슬 어머니에게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 책을 산다고 거짓말을 하기도 했고 때론 아버지의 주머니에서 돈을 슬쩍하기도 했다. 그래도 돈이 없는 날에는 분식센터 입구에 쪼그리고 앉아 흘러나오는 노래에 만족해야 했다. 그 일대는 어느 틈엔가 불량 청소년들의 근거지가 되었고, 그들은 분식센터 주변을 매일같이 어슬렁거리는 나에게 시비를 걸어왔다. 그 때 그 아이들과 어울렸다면 나는 어떻게 됐을까.

  그 당시 우리 반에 소아마비로 다리를 저는 아이와 친구가 됐다. 우연한 계기로 나는 그 친구의 책가방을 들어주게 되었고 그 일은 이후 3년 동안 계속되었다. 어릴 적부터 나는 무엇이든지 나누는 일이 즐거웠다. 집에서 혼쭐이 나면서도 누군가에게 뭔가를 주려고 했다. 연민의 정을 느끼면 그냥 돌아서지 못했던 내 천성이 그 아이와 중학교 3년 동안을 함께 하게 했던 것 같다. 이른 아침 퇴계로의 친구 집에 가서 함께 택시로 등교를 했고, 하교 길에는 분식센터로 동행하곤 했다. 물론 용돈은 그 친구가 조달하였다. 덕분에 분식센터 주변을 배회하지 않고도, 편안히 분식센터 안에서 음식을 먹으며 음악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친구는 어린 나이에 걸맞지 않게 큰 돈을 항상 지니고 있었다. 알고 보니 그 친구의 어머니는 무당이었다. 신병으로 몸이 너무 아파 신을 모셔 놓기만 했다고는 하나 그 집에 간간히 특별난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던 것을 기억 해보면 아마도 치성 정도는 했었던 것 같다. 처음에는 소아마비인 딸이 안타까워서 용돈을 넉넉히 준다고 생각을 했었다.

  자세한 내막까지 알 수 없었던 나는 좋아하는 음악을 듣기 위해서 그 친구가 필요했다.  그러나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나는 불쌍한 그 친구 어머니의 돈을 허락도 없이 쓴 것이 되고 말았다. 알고 보니 그 친구의 어머니는 명동에서 구멍가게를 하셨고 친구가 구멍가게를 지키면서 어머니 몰래 돈을 가지고 나온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외로움을 느끼던 사춘기 시절에 두 사람 모두 친한 친구가 없는 상태에서 독특한 계기로 가깝게 될 수밖에 없었으리라.

  여전히 나는 밤이면 가위에 눌리고 열이 나서 헛소리를 했다. 밤에 잠들기가 힘들었다. 여러 공상 속에 잠을 못 이루면서 나의 음악수업은 시작됐다. 페티 페이지의 ‘케세라세라’, 폴앵카의 ‘크래지러브’ ‘오티스레딩’의 ‘부둣가에 앉아서’ 델 쉐논의 ‘키스로 봉한 편지’ 등을 들으며.... 그런데 어느 날 클리프리차드의 콘서트를 텔레비전에서 방영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집집마다 텔레비전을 갖추고 살던 시절이 아니라 얼른 친구 집으로 달려갔다. 이화여대 강당에서 열렸던 내한 콘서트. 화면 안의 세계는 라디오에서 느끼고 상상하던 음악의 세계와는 너무나도 딴판이었다. 관객들의 열렬한 환호성과 열광하는 장면을 보며 흥분했고 그 흥분은 나를 미지의 세계로 안내하고 있었다.

  점점 더 내용을 모르면서도 밤을 지새우며 팝송을 들었다. 그리고 그 음악취향은 록 음악으로 이어졌다. 록은 내일모레가 쉰 살이 되는 지금까지도 내 생활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산타나(Santana), 벤춰스(Ventures), 후리우드 맥(Fleetwood Mac)....

  급기야 고등학교 입학과 함께 나는 명동으로 진출한다. 유라이어힙(Uriah Heep), 딥퍼플(Deep Purple), 래드제플린(Led Zeppelin),  르네상스(Renaissance), 핑크프로이드(Pink Floyd), 제퍼슨 에어플레인(Jefferson Airplane), 자니스 조플린(Janis Joplin),  킹크림슨(King Crimson),  크림(Cream)과 같은 뮤지션의 세계로 점점 더 깊이 빠져들었다. 그로 인해 학교 친구들과는 더욱 멀어지게 되었다. 판 한 장을 살 수 없는 가난한 나는 음악에 대한 갈증은 점점 심해졌고, 우연히 대마초를 몰래 피우며 음악을 듣는 곳이 명동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코스모스백화점 옆 골목 속에 ‘예스’라는 곳과 ‘쓰리나인’ 골목 속에 있는 ‘이브’ 두 곳을 번갈아가며 죽순이가 되어버렸다. ‘예스’의 뚱뚱이 사장님은 나를 참 예뻐하셨다. 음악듣기만 열중해서 그랬을 것이다.

  그러니 무슨 공부가 되었을까...더더군다나 가난한 우리 집 살림살이와 두 어머니와 아버지의 얽힌 관계는 경제적인 면에서 최악을 달리게 했다. 큰 집 아이들은  같은 아버지를 두고도 항상 우선권이 있었다. 우리 집은 작은 집의 아이들로서 항상 큰 집에 모든 것을 주고 난 뒤에 차지였다. 반에서 꼴찌로 내는 월사금은 내게는 치욕적이었다. 월사금을 기간 내에 내지 못하면 칠판에 이름을 써놓는 일이 예민한 사춘기 때에 얼마나 큰 상처로 남는 다는 것을 교육자들이 알까? 작은 내 가슴 속은 온통 빈부의 차이에서 오는 좌절과 고통이 커지면서 상처투성이가 되 가고 있었다.

  그런 환경 속에서 나는 부모에게 의존심을 버렸다. 나 나름대로의 인생을 꾸리기로 작정을 했었다. 그것은 대학을 아예 포기하기로 마음먹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장학금을 타서 공부한다는 것은 내게는 무리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대로 돈을 버는 일을 할 것 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너무나 막연한 내 앞날에 괴로워해야만했다. 그 탈출구는 음악을 듣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나는 점점 반항아가 되어갔다. 아마도 그때부터 내 몸 안에 있는 광기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다.그 광기는 차츰차츰 신기로 이어지고 그 신기가 서른다섯 해에 분출 된 것이리라..

  학교를 땡땡이치면서 가뜩이나 한 많은 어머니의 애간장을 태운 것도 이 무렵이다.  어렵고 힘든 가정 형편 속에서도 어머니는 나의 재능이라고나 할까 어떤 끼를 보시고는 고전무용을 가르치려 애를 쓰셨고 뒷바라지가 안 될 때는 도중에 그만두게 하시기도 했다. 또 내 극성스러움이 발동을 해서  초등학교 시절에 영광 어린이 합창단 오디션에 합격을 하는 바람에 어머니는 또 그 어려운 가운데 뒷바라지를 버겁게 하셨다. 영광어린이 합창단은 우리나라 여러 도시를 순회공연을 했다. 일본으로 공연을 간다고 열심히 연습을 했다 그러나 명단에서 내 이름 이 빠져있었다. 실력보다는 돈이 많은 아이들에게 밀려 또 중도 하차를 해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니의 심정은 말 할 수없이 아팠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어머니의 심정은 아랑곳하지 않을 때였다.  청개구리나 다름이 없었다. 어머니가 성당을 다니라고 하면 임마누엘 루터교회에 다니고, 급기야는 혼자 도봉산을 오르면서 절에 다니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나에게 좀 특별한 애정을 쏟던 분이셨다. 선생님은 불교 신자였고 나를  때때로 일요일이면  선생님의 돌아가신  어머니 영정을 모셔놓은  절에 데리고 가곤 했다.  놀랍게도 그 절의 스님은 나더러 앞으로 많이 힘겨운 생활을 하게 될 거라며 이상한 부적들을 몸에 지녀주시기도 했고 집으로 보내오기도 했다. 어머니는 그런 것들을  발견하면  역정을 내시면서 밖으로 내다버리곤 하셨지만…….

  그렇게 사춘기 시절을 보내면서 나는 집을 떠나기를 좋아했다. 가출은 분명 아니지만  방랑벽이 생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시간 만 나면 산으로 강으로 헤 메이고 다녔다.

 

  내가 네 번째 만난 죽음은 대성리에서였다.  방학이 되어 같은 반 아이가 외가로 놀러 가자고 하여 여러 친구들과 함께였다. 우리는 한참 재잘거리며 강가를 걷고 있었다. 그때 시야에 들어온 것이 사람의 머리였다, 물에 빠져 죽은 시체를 건져내어 가마니로 덮어 놨던 것이다.  친구들은 소리를 지르며 혼비백산해서 뛰기 시작했다. 뒤쳐져서 뛰던 나는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나를 마구 잡아당기는 그런 느낌으로 견딜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내게 자꾸만 뭔가를 느끼게 하는 것 같았다. 그때 나는 영혼 이라는 것이 세상엔 반드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느낌으로 확신했다. 대성리 에서 죽음은 나에게 귀신의 존재를 느끼면서 사후 세계를 깊이 생각하게 만든 계기가 된다.

  그 뒤 난 학교에서 아무도 상대 안 해주는 말들을 가끔씩 던지곤 했다. 마치 내가 뭔가를 아는 사람처럼  알아주지도 않는 말들을 내 뱉고는 한 것이다. 아이들은 그런 나에게 남자친구와의 관계를 상의하기도 했고, 선생님을 짝사랑하는 고백을 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서는 집안문제들을 상의하기도 했다.

  여전히 가위에 눌리는 횟수는 잦아졌다. 식은땀을 흘리면서 열에 들떠 헛소리를 하곤 했지만 여러 형제들 중에 말썽꾸러기나 다름없던 나를 주의 깊게 살피는 식구는  없었다. 어려서 잠깐 늑막염을 앓았었고 항상 몸이 허했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셨을 거란 생각도 든다. 무서움은 점점 심해지고, 밤에는 화장실을 못가고 날이 밝을 때까지 참기도 했다. 무서움을  달래는 방편으로, 음악을 듣지 못 할 때에는 책을 읽기도 했다. 우연히 무협소설을 접하고는 한동안 무협소설에 빠져 헤어나지를 못했다. 무협소설의 황당함이 나를 잡아끌었던 것이다. 지금 기억나는 것은 별로 없지만 란 「사자후」라는 책은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다. 무협소설에 나오는 중국대륙의 여러 지역의 배경들 과 또한 그 주인공들의 험난한 일대기라든지, 기인들의 행동들, 도인들, 의리와 신의, 배신과 복수 ,선과 악, 옳고 그름 등등이 나에게 많은 상상을 하게 했고 때로는 운기조식이라는 것을 해보려 꼼짝 않고 가부좌를 틀고 지그시 눈을 감고 책에서 읽은 대로 따라하기도 했다. 장풍이란 것을 해보고 싶었고 내공을 쌓는다고 열중하기도 했다. 검술에 매력을 느껴 검도를 시작했다가 일주 일만에 그만두기도 했다. 허공을 붕붕 날아다니고 축지법을  사용해서 어디든 가고 싶은 곳을 갈수만 있기를 상상했다. 허구한 날 총천연색의 황당한 꿈을 꾸기 시작한 것도 아마도 그런 상상으로 영향을 받았을 거란 생각도 든다.

  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 도 이때쯤이다. 적토마, 백마, 흑호마, 천리마... 말은 나에게 어떤 희망을 부여하기도하고 넓은 세계를 펼쳐 줄 수 있는 자유로움을 상상할 수 있게 해주는 동물이었다. 무협소설에 나오는 말 들이 꿈속에서 어른거리고 그런 날 은 어김없이 뚝섬경마장을 어슬렁거렸다  말을 타고 싶은 생각은 굴뚝같았고  그 욕망은 아무잡지에서나 눈에 띠는 대로 말 사진을 전부 오려서 간직하다가 또 어머니한테 걱정을 들었다.  이상한 짓만 골라한다고.....

  말에다가 관심을 갖으면서 우연히 펜싱경기를 보게 됐고 난 또 펜싱에 반해 주제 넘는 짓만 골라서 하는 아이가 되 버렸다. 결국은 다 현실에서는 이룰 수 없는 꿈만 꾸며 사춘기를 보낸 것이다. 결국은 지금 나는 그 시절의 소원을 이루었다. 내 나이에 승마를 시작했다. 처음 말에 오르고 나서의 그 기분은 말로 표현하기에는 내 글 실력이 부족하다.

무한한 세계로 나갈 수 있는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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