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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공연의소고

담박제 2004. 4. 19. 23:20
    굿공연의 소고


  굿이 공연의 형태를 지니기 시작한 계기는 1960년대 전국 민속경연대회에 굿이 포함되면서부터였다고 본다. 사라져 가는 전통문화를 폭넓게 되살리자는 취지였을 것이다. 이후로 굿은  규모가 차츰 커지면서 종교적인 차원에 국한되지 않고 종합 예술적 측면에서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했다. 아울러 굿만이 지니는 전통 예술 공연물로서의 가치가 인정되면서 국가적인 차원에서 보존가치가 있는 다양한 장르의 굿들이 중요 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에 이른다. 서해안 풍어제, 동해안 별신굿, 진도 씻김굿, 경기 도당굿, 서울 새남굿, 남해 별신굿, 제주 칠머리 당굿 등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이후 중요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굿은 규모와 형식이 과거와는 다른 공연물로서 변신을 시도하게 된다. 예를 들어서 서해안 풍어제는 이 나라의 원로 만신 김금화 선생님으로 인하여 그 예술적인 가치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김 선생님은 무당의 공연문화에 한 획을 그은 분으로서 그 분의 천부적인 예술성이 아직도 무대에서 유감없이 발휘되곤 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공연들이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면서 본질을 벗어난 공연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일부 무당들은 마치 무대에만 서면 스타가 되기라도 하는 듯, 자비를 들여서 공연을 벌이면서 광고 효과를 기대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공연에 소요되는 막대한 비용을 쏟아 부으며 매스컴까지 동원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경우에 대학교수를 비롯, 무교를 연구하는 학자들까지 동원된다는 점이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무당이 된지 채 3년도 되지 않는 애송이 무당들마저 공연 판에 끼일 정도가 되었다. 그런 무대는 하나같이 굿 공연의 발전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본래의 취지가 퇴색한 공연이 될 수  밖에 없으며  좋은 굿 공연으로 굿의 긍정적 가치제고를 기하고자 어렵게 노력하고 있는 원로 만신들의 노고에 찬물을 끼얹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라는 것은 생각이 있는 이들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다. 수년 전부터 때로는 초대형 무대에까지 등단하고 있는 나 역시 그러한 부정적 부류의 일원이 아닐까 하는 회의에 빠지기도 한다.

  내가 굿 공연과 인연을 맺은 사연은 꽤 엉뚱하게 시작되었다. 2000년을 앞둔 밀레니엄 행사로 서대문 형무소 자리에서 굿 공연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원로 만신이 주관하는 공연이라 인사도 드릴 겸 공연장을 찾았다. 친근한 무당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 며칠 후 어느 분이 전화를 걸어왔다. 몇 번씩이나 연락을 하여도 연락이 되지 않았다고 하면서 집으로 한번 찾아오겠다는 것이었다. 집으로 찾아 온 그분은 다짜고짜로 서대문 형무소 공연장에서 나를 보고 호기심이 생겼으며, 함께 공연에 참관하였던 사진작가에게 전화번호를 물어 알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의례적으로 상을 앞에 두고 마주 앉았다. 그런데 일본 사무라이처럼 무릎을 꿇고 앉은 그분의 눈에서는 섬찍할 정도의 강열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갑자기 등에서 식은땀이 쫘악 흘러 내렸다. 나는 아득해지는 정신을 수습하려고 심호흡을 하였다.  ‘예사로운 분은 아니로구나’ 하면서도 도무지 그 분의 정체에 대하여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단전에 잔뜩 힘을 모으고 마음속으로 신령님을 부르며 나는 조심스레 말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살아 온 삶과는 전혀 다른 길을 가게 되는 전환점에 들어서 있으며, 다만 아직도 결심이 확고하지 않고 성품이 소심한 것이 큰 흠이라고 덧붙였다. 그분의 눈빛이 조금 부드러워지는 듯하더니 대화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분은 자신의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만족한 듯 보이기도 했고, 어쩌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아무튼 대단히 어려운 상대임엔 틀림없었다.

  그쪽에서 내게 조심스럽게 묻는다.

“혹시 음악을 좋아하시나요?”

  나는 속으로 별걸 다 물어보네 하면서도 “예, 아주 좋아하는 편이예요”라고 솔직히 답했다. 그러자 무슨 음악을 좋아하냐고 묻는다.

“저는 록음악을 들어요. 메탈도 듣고요... 특히 하드 락을 좋아해요.”

대답을 하면서도 사실은 흉잡힐까봐 조심스러웠다. 이 나이에 애들처럼 록이나 헤비메탈을 듣는다고 하면  미쳤다는 소리밖에 더 듣겠는가 싶어서였다. 그런데 뜻밖에 그 분에 눈에서 다시 그 무서운 기운이 뿜어져 나오더니 “저도 락을 좋아하지만 음악을 조금 더 들으셔야겠네요” 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속으로 비웃고 말았다.

“치... 지가 알면 얼마나 안다고 흥” 그러나 결코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분은 음악, 문학, 미술, 무용에 연극까지 예술 장르에 대한 지식이 누구보다도 해박한 분이셨다. 예술분야에서는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과 다름없는 그 분은 공연 기획, 연출, 음반제작, 그리고 사운드 엔지니어링 등의 방면에서 프리랜서로 다양한 활동을 펼쳐 나아가고 있었다. 그 때의 만남에 대해 지금도 그분은 가끔씩 나를 놀려댄다.

“그날 보니 똥차 앞에서 방귀를 뀌고 앉아 있더구만...”

  며칠 후 그 분은 친구와 함께 다시 우리 집을 찾아 오셨다.  친구 분을 상담하고 나니  그분은  뜬금없이  내게 연극을 좋아하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좋아는 하죠. 그런데 요즈음은 별로 볼 만한 것도 없는 것 같고, 혼자 보러가기도 그래서 잘 안가는 편이에요.”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자기와 관련이 있는 극장에서 연극 공연이 있으니 시간이 있으면 보러 오라고 권유했다. 마침 시간도 있었고, 모처럼 연극을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극장을 찾았다. 그렇게 하여 오대환 감독님과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오 감독님은 그 뒤로도 6개월 여 동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여러 가지 미끼를 던져서 나를 테스트 하셨다. 잉위 맘스틴의 공연, 메가데스의 공연 등 절대 내가 거절할 수 없는 공연 티켓이 미끼였다. 무대위로 나를 끌어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무렵의 나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고, 마음의 여유라곤 통 갖지 못할 때여서 그분의 의도를 거의 눈치를 챌 수 없었다. 사람들과의 상담을 피하고  산 속으로만 줄달음칠 때였다.

   그러던 어느 날 오 감독님이 공연제의를 하시면서 본인이 평소 음악에 관심이 많다보니 현대무용의 배경음악에 손을 대기 시작했고, 그러다 보니 음악과 행위들이 외국 스타일에 의존하는 것을 보고 다른 각도에서 한국무용에 손을 대기 시작했는데 한국무용 역시 서구적인 정서가 침투해서 고유한 우리 정서 속에 있는 맛과 멋을 느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진짜 우리 것>을 찾아다니다 그것은 민초들 사이에서 구전으로 내려오는 것들, 그리고 오버 그라운드가 아닌 언더그라운드의 문화에서 찾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지니게 됐다고 했다. 그런 것들을 갖추고 있는 굿판이야 말로 <오래된 미래>라는 생각에서 현대화된 무대 감각을 지닌 무당을 찾아 나섰고, 그런 무당이 아예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무대 위에 올리겠다는 뜻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단호한 어조로 홍대 앞 주차장 거리에서 굿 공연을 한판 하자고 제의하셨다. 개런티까지 준다고 하니 부담스러웠다. 신어머니를 따라 공연을 할 때면 나도 언젠가는 나만의 공연이라는 것을 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지녔지만 그것이 이루어질 것에 대한 상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청이 좋지 않은 탓에 자신감도 없었다. 공연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소리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굿은 소리와 춤이 제대로 어우러져야 맛이 나는 법이 아닌가. 그래서 극구 사양하면서 나를 무대에 세워놓고 망신당하면 책임질 거냐고 하였다. 사실 감독님은 내가 굿을 하는 것을 한번도 본적이 없는 분이었기 때문에 정말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감독님은 끈질기고 집요했다. 결국 나는 ‘그래 한번 해보자’며 준비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배짱 좋게 개런티까지 받아가며 첫 공연을 벌였다. 한일 아트 페스티벌의 오프닝으로 시작된 굿 공연이었다. 한여름 저녁에 주차장 거리에 꾸며진 이동식 무대 위에서 펼쳐졌다. 알록달록한 원색의 지화를 만들어서 굿상을 장식했다. 그때 감독님은 머리를 삭발한 한 사람을 소개했다. 연극, 무용, 퍼포먼스 분야에서 유명한 심철종씨였다. 그는 한일 양국의 대표적인 무용가를 초대해서 한일 아트 페스티벌을 해마다 열고 있었다. 그 역시도 눈빛에서 강한 기운이 뿜어져 나온다. 그 기운은 광기에 가까웠다. 내 광기와도 비슷하게 느껴졌다. 흥분된 마음을 진정시키기란 쉽지 않았다. 그날 공연은 내 정신이 어디로 갔는지 도무지 알 수 없을 정도였고, 어떻게 치러 냈는지도 생각이 안 날 정도다. 부족한 청은 감독님의 음향기술로 커버되었고 나는 날아갈듯 작두 위에 올라 한껏 폼을 잡았다. 고사반을 넘기는 덕담으로 소리를 하자 몰려 있던 젊은이들이 박수로 박자를 맞추며 흥겨워한다.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기도 한다.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인지, 실수는 없는지 판단할 겨를도 없다. 몽롱한 상태로 무대에서 내려올 때 내 귓전에 들려오는 소리는 <무당 앙콜!>이라는 환호성이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처음 하는 단독 공연이 잘되어 봤자 얼마나 잘되었겠는가? 실수와 부족함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쏟아지는 환호의 의미는, 내 공연에 대한 찬사 이전에 이 땅의 굿만이 자아낼 수 있는 신명과 독특한 에너지 때문이었으리라. 굿판의 신명은 한국인의 핏줄을 타고 흐르는 것임을 확인하는 현실적인 증거였던 것이다. 그렇게 얻게된 믿음은 그 날 첫 공연의 가장 큰 소득이었으며 이 귀중한 소득은 지금까지도 나에게 공연에 대한 갈구와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원천이 되고 있다.

  그날 감독님은 기대 이상이었다며 좋아하셨다. 아마도 내게 용기를 주느라고 그러셨을 것이다. 이후로 심철종씨 와 나는 아주 좋은 관계를 유지하게 됐다. 가끔씩 심철종씨 로부터 무대 위에서 자기가 갖고 있는 광기를 뿜어내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를 듣곤 한다. 그날 공연을 본 사람들 사이에서 공연제의가 들어오기 시작했고, 나는 그때부터 무대를 굿판삼아 공연을 하기 시작했다. 오랜 내 바람대로 나의 공연은 젊은이들과 하나 되는 자리가 되었다. 여의도 고수부지에서 열린 테크노 파티의 오프닝 공연도 재미있었다. 젊은이들의 굿에 대한 관심은 대단했다. 어울림의 장이 마련됐다는 면에서는 아주 성공적이었다. 물론 나의 실수로 굿은 그렇게 매끈하게 치러지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의 공연 가운데 내 생애에 잊지 못할 공연은 세종문화회관에서의 공연과 월드컵 기념공연이었다. 몇 차례의 공연을 가진 뒤에 오 감독님이 제의를 해오셨다. 가야금의 명인 황병기 선생님의 창작활동 40주년 축하 헌정 음악회가 열리는데 그 무대 위에서 색다른 연출을 해 보자며 굿을 무대에 올리자는 것이었다. 왈칵 겁부터 났다. 음악계의 거장이자 평소 존경해온 분에게 누를 끼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출연진도 우리음악 분야에서 저마다 손꼽히는 분들이었다. 그분들과 한 무대에 선다는 것은 꿈만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만큼 나에게는  부담이 큰 공연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집 센 오 감독님이 아니던가. 더구나 황병기 선생님께서도 용기를 주셨다. 한껏 겁먹은 나에게 오 감독님은 유진규 선생을 소개하셨다. 이 나라 마임계의 거장 유진규 선생에게 과외 수업을 받으라는 것이었다. 이후로 나는 춘천 마임의 집을 오가며 유진규 선생님을 사부님으로 모시면서 무대 위에서의 기본  자세들을 배웠다. 지금도  내가 공연을 할 때면 언제나 상의 드리고 조언을 얻는다.

  유진규 선생님은 마임활동을 하면서 우리만의 몸짓을 찾는 일에 몰입해 오신 분이다. 그리고 그 몸짓을 아주 자연스럽게도 굿판에서 찾으신 분이다. 그러나 굿판의 미궁 같은 깊고 다양한 전개 앞에서 고심하던 중이었다. 그런 차에 내가 신어머니께 배운 대로 굿을 무대 위에 올리는 것을 아시곤 자연스럽게 과외 선생님이 돼 주신 것이다. 유진규 선생님과 나는 공동으로 공연을 준비했다. 작품 제목을 영목(靈木)으로 정했다. 유진규 선생님은 동작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신경 써 주시면서 격려하셨다. 그런데도 자신이 없어서 공연에 빠지겠다고 간청하기도 했다.

  공연 전날에는 밤새 잠 한숨을 못자고 말았다. 세종문화회관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천근만근이었다. 분장실에 들어섰지만 그저 달아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어쩌랴, 이미 달아나기는 틀린 것을... 도무지 가슴이 두근거려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아무도 몰래 진정제와 우황청심환을 먹었다. 행여 실수라도 하는 날에는 큰 일이 아닌가. 호흡을 가다듬고 눈을 감고 공연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심정이라니... 감독님은 전체를 신경 써야 하는 그 분주한 와중에도 ‘춤추다가 넘어져도 괜찮으니 걱정 말고 평소대로 하면 된다며 격려를 마다하지 않았다. 괜시리 눈물이 났다. 내 흠 중에 하나는 눈물이 너무 많다는 거다.

  타악 연주의 대가 김대환 선생님의 북소리를 들으며 나는 무대 위를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이상하리 만큼 차분해진다. 가야금과 드럼, 키보드에 맞춰 서서히 몸을 풀면서 나는 아무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냥 음악에 맞춰 움직이고 있을 뿐이었다. 막이 내린 뒤 분장실로 어떻게 찾아 들어왔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그저 부끄럽고 창피하고 행여 중요한 공연을 망쳐 놓은 것은 아닌지 바늘방석에 앉아있는 기분이었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고 아니 집보다도 산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그리고는 아주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고 싶었다.  평생 잊지 못할 공연이었다.

  후에 들은 이야기다. 이 나라에서 최고로 꼽히는 피아니스트 한 분은 공연 일정이 가까워지면 공연장에 불이라도 났으면 하는 심정이 된다고 한다. 경륜 많은 연극배우는 몸져누워서 공연이 아예 취소될 수는 없을까 하는 상상을 하곤 한다는 것이다. 전석 매진 사례를 가져올 만큼 대단한 인기를 누리는 최고의 연주가들도 공연을 앞두고는 전전긍긍한다는 얘기는 내게 작은 위안이 된다. 그러면서도 공연을 마치고 나면 그 희열 때문에 곧바로 다음 공연을 계획하는 걸 보면 무대가 주는 마력이란 놀라운 것 같다.

  그 공연 이후로는 다양한 방식의 공연에 참여하게 됐다. 월드컵 기념 공연은 외국인 기자들을 초대해서 우리나라의 깊은 문화예술을 알리기 위해 만들어진 공연이었다. 코엑스 오디토리엄에서 이루어졌다. 황병기 선생님을 중심으로 여러 장르의 예술이 무대에 올랐다. 공연은 모든 출연진들의 호흡이 척척 맞았고 매우 성공적이었다는 평을 들었다 . 강은일, 허윤정, 유경화, 이용구, 유은선등 국악계 에서 손꼽히는 최고의 연주진들과 호흡을 맞춘 것이다. 그들의 연주에 무당의 의복을 갖춰 입고 굿 의식을 부분적으로 표현한 공연은 지금 생각해도  흥분이 되곤 한다. 공연이 끝난 뒤 외국기자들은 코리아는 신비의 나라라고 극찬을 했다고 한다. 

  크고 작은 공연을 많이 했지만 늘 미흡한 것부터 생각나고 서툴렀던 것부터 기억하게 된다. 그래서 공연이 끝나고 나면 언제나 허전하다. 완벽하게 준비하지 못한 것 같아 속상할 때도 많다. 과연 언제쯤이면 생각처럼 딱 떨어지는 공연을 하게 될 것인가. 무대에 설 때마다 나는 언제나 내 공연의 목적을 생각한다. 무당이 직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철칙처럼 광고 효과를 노리는 공연이라면 나는 결코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철썩 같이 지키고 있다. 그것은 나와 더불어 무대를 즐기는 이웃들에게 실망을 안겨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몇 무당들처럼 광고나 자기를 알리는 목적으로 공연을 하는 것이 아니 라곤 해도  무대에선 프로의 정신으로 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헌정무대 내지는 자선무대가 아닌 이상 개런티 없는 공연이 과연 참다운 공연이라고 할 수 있는지 나는 의심스럽다. 출연료는 돈이기 이전에 사회에서 능력에 대한 예우표시라고 생각한다. 예우 없는 공연은 자존심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무대 위에서의 굿 공연만큼은 종교적인 면이 강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오히려 예술적인 측면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는다. 공연물의 측면에서 본다면 굿은 음악과 무용, 마임, 연극 등 예술 전 장르가 신기와 신명으로 자연스레 어우러지는 총체적 무대라고 본다. 이러한 굿이 공연물로 적절히 기획된다면 객석에 큰 감동을 주는 비범한 무대가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이 신기(神氣)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전제한다면  무당의 굿이 무대화될 경우 토속적인 신기가 발휘되는 가장 한국적인 종합예술로서 분출되리라고 믿는다.

  그러하기에 나는 의욕과 두려움이 혼재된 정서로 여러 각도에서 진정 열심히 배우고 연마하고 있다. 많은 젊은 예술가들이 굿판에 무엇인가를 찾으려고 온다. 그러나 현실과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는 우리네들과 부딪히면서 중도에 포기하는 모습을 아쉽게 지켜볼 때가 있다. 더러는 굿판을 쫓아다니면 신이 내릴 수 있다고 지레 겁을 먹고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 그만큼 무당과 굿이라는 것이 일반에게 잘못 인식되어 있는 탓이다.

  무당을 오해하거나 왜곡되게 알고 있는 이 나라의 젊은이들에게, 또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종교적인 차원 이전에 굿이란 오랜 역사동안 우리의 정서를 질박하게 담고 내려온 순수한 생활 속의 문화라는 것을 조금이나마  알릴 수 있다면  나는 무대 위에서 앞으로도 끊임없이 굿 공연을 행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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