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의소리 ,몸의소리본문중에서

뭐 뭐 하는 셈치고

담박제 2004. 4. 19. 23:18
 

뭐, 뭐 하는 셈치고


  초등학교  2학년 무렵 우리 집은 충무로에서 쌍림동 큰대문집 옆의 판자 집으로 이사를 했다. 일곱 식구가 한방에서 가로로 자고 모로 자는데 내 잠자리는 항상 발밑 이였다. 집주인은 밀주를 빚어 판매하며  생활을 했었는데, 밀주를 자전거에 싣고 몰래 남의 눈을 피해 집밖으로 내보내야했다. 이사를 한지 얼마 안 되어서 그 망을 보는 것은 내 담당 이 됐다.

  집주인은 내가 눈치가 빠르고 재빠르다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술 찌꺼기를 미끼로 망보는 일을 시키곤 했다. 항상 배가 고파 허기져있던 나는 즐겨 자청을 했었다 뉴슈가 라고 불린 사카린을 살짝 탄 술 찌꺼기는 달착지근하고  시장기를 면하게 했다. 빈속에 먹던 술 찌꺼기와 술밥 때문에 난 번번이 술에 취해 얼굴이 빨개져 있었다. 그러나 몇 달 뒤에 우리 집은 이사를 했다. 내가 크고 나서 알았지만 그 집에서 우리 일곱 식구들은 쫓겨난 것이었다. 술 찌꺼기로 고픈 배를 채울 수 있는 일거리도 없어졌다. 그때에 그 경험이 지금 술 한 모금을 입에 대지 못하는 체질로 변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하긴 어릴 적 징그럽도록 먹던 김치국 또는 젖은국수, 칼국수, 국수, 수제비등은 지금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당시에는 모르는 사실이었고, 지금도 발설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지만 우리 가족의 구조는 애매했다. 아버지가 왔다 갔다 하시는 큰집이 있었다. 쌍림동 집에서 쫓겨나 집도 절도 없이 되어버린 어머니는 그 무렵에 약수동 산꼭대기에 위치한 쌀가게를 하던 큰집에서 우리 큰언니를 공부를 시켜준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보내주기를 원하자, 큰언니, 둘째언니, 그리고 나까지 잠시 맡 길수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큰엄마라고 부르는 그분은  약속과 달리 큰언니를 공부는 시키지도 않고 조그마한 몸으로 쌀자루를 이고 산비탈 동네 길을  힘들게 배달을 시켰다. 지금도 그때의  큰언니의 모습을 생각하면 가슴 저며 오는 슬픔이 느껴진다. 둘째언니와 나는 중부시장 가판대 위에서 막내여동생과 남동생을 데리고 생활하시는 어머니를 보러 가기 위해 그 추운 겨울날 약수동에서 중부시장까지 걸어 다니곤 했다. 내가 큰집 다락에  쌓여진 쌀을 보고  가서는 어머니에게 투덜거릴 때마다 가슴 아파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은 지금도 항상 내 가슴에 남아있다. 어머니의 한이  지금의 내 한보다도 더 깊고 아팠다는 것은 내가 철이 들면서 알기 시작했고 마흔이 넘은 지금은 가슴이 저미도록 어머니의 한을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자식을 가슴에 묻고 사는 아픔에 서러워하다, 어머니를 떠올리며 어머니가 가슴에 묻고 사는 아픔까지 생각하면 꺼이꺼이 눈물을 흘리며 밤을 지새우는 적이 많다. 그럴 때는 나는 더욱 슬픈 음악을 들으며 끝없이 눈물을 흘리곤 하는데, 한참을 울고 나면 속이 한결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누구는  별다른 삶을 살았을까? 저마다 자신의 삶이 남과는 전혀 다른 삶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기도 하고, 자기가 처해있는 현실이 세상에서 가장 처절하고 불행하고 힘겹다고 생각들을 하면서 살아간다. 나 또한 내 삶이 참으로 기구 하다고 여긴 적도 있다.

  그러나 내가  천지신명을 모시고 난 뒤 나를 찾아오신 분들과의 넋두리 속에서, 내 서러움과 상대방의 서러움에 목이 메어 상담을 진행하기 조차 어려웠던 경험들을 하면서 나만이 그렇게 기구 하게 사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의 수많은 고통과 아픔을 접할 때마다, 그래도 나는 조금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내 자신을 다잡기도 한다.


  내 자신을 뒤돌아보면, 아무리 궁색해도 누구에게나 궁색함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를 썼고, 내 무지와 어리석음을 잘 알기에 내 무지와 내 어리석음을 남에게 안 보이지 않으려 애를 썼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렇게 척하면서 살아온 시간들이었다. 지금도 가끔씩 어린 날에 읽었던 소공녀의주인공 세라를 떠올린다. 주인공 세라는 갑자기 바뀌어버린 비참한 환경에서도 혼자서의 상상 속에서 ‘뭐뭐 하는 셈 치며’ 밝고 긍정적인 삶을 살아가다가 결국에는 다시 행복한 삶으로 돌아가지 않는가? 나는 나이가 불혹을 넘었어도 세라의 슬기로움을 곱씹는 것이 나의 신조처럼 되어 있는 것이다. 마음의 여유를 찾는 것이 곧 마음의 부를 얻는 것이기에 항상 나는 밝게 웃으며 살아가려 애를 쓴다. 너무나 오랜 세월을 눈물 속에서 보냈지만 그 누구도 내가 눈물을 흘리며 살아간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내가 그토록 힘들어한다는 것을 아는 이가 없었다. 그것은 바로 내게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친구가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기도 하는 것이다. 새삼 생각해보니 부끄럽게도 나는 친구가  없는 아이였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을 한 그 시절에는 교복을 맞춰 입지 못하고 학교 에 온 아이들이 참 많았었다. 지지리도 가난했던 우리 집의 가장노릇을 했던 큰언니는 초등학교를 간신히 졸업하고, 낮에는 종로 화신 백화점 앞의 교복점에서 점원으로 일했었다. 게다가 밤에는 식구들의 생계유지를 위해 편물, 즉 스웨터 짜는 일을 하고, 어머니는 마무리 작업을 하셨다. 그러한 큰언니 덕에 나에게는 교복이 세벌씩이나 있었다. 물론 그 교복의 애매한 출처는 알 수 없었지만…….

  하루는 같은 반 아이 중에 왠지 마음에 드는 아이가 교복을 입고 오지 못했던 모습이 서운하여 나는 그 애매한 출처의 교복을 하교시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그 친구에게 벗어 주고는 혼자 무척 흐뭇해했다. 그 때 그 일로 어머니와 큰 언니는 나에게 굉장하게도 혼을 냈었지만 그 흐뭇함만은  전혀 꺾이지 않았다. 그 사건으로 인해 학교에서는 내가 무척이나  잘사는 집의 딸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담임선생님은 걸 스카우트에 가입을 권유 했다. 어머니는 두말 안 하시고 그 없는 생활비에서 가입비와 단복을 맞춰주시기도 했다. 모두들 나하고 친구가 되고 싶어 했고 학교생활은 즐거웠다.

  그러나 이런 즐거움은 아주 잠시 동안 이어졌을 뿐이었다. 옛날에는 담임선생님이 학생 집에 가정방문 이란 것이 있었다. 얼마 안 되어 가정방문이 시작됐다. 담임선생님은 함 아무개 선생님이었는데 나는 입학 이후 두어 달 동안에 그 선생님의 귀여움을 독차지 하다시피 했었다.  그런데 그 가정방문 이란 것이 내 학교생활을 어둡게 만드는 사건이 되어버렸다.

  을지로 4가 문간방에 세를 들어 살면서도 어린 내 마음에는 그 때까지 살아온 집 중에는 제법 번듯한 집이라고 생각을 해서였는지 단 한번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우리 집에 선생님이 오신다고 하니 나는 마냥 좋기만 했다. 내 눈에는 너무나 예쁘고 곱게만 보였던 내 어머니는 가정방문 이야기를 들으신 후로 걱정이 태산이셨다. 절대로 선생님이 집에 오셔서는 안 된다고 걱정을 하셨다. “오시면 안 되는데... 대접할 것도 없는데…….” 어머니께서 그리도 걱정하시는 이유를 알 수 없던 나는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어머니가 시키신 대로  어머니가 집에 안 계신다고 선생님께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선생님은 막무가내로 너희 집은 꼭 가야 한다면서 집을 방문하셨다.

  선생님이 안 오실 줄 알고 어머니는 밤늦도록 바느질을 한 탓에 그냥 잠시 졸고 계셨고 나는 허둥지둥 선생님 오셨다고 어머니를 깨웠다. 집문 앞에서 문간방으로 안내를 하자 선생님의 안색이 굳어졌다. 어린나이지만 선생님의 돌변한 표정을 눈치 채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선생님께서는 황급히 돌아가셨고, 다음 날부터 선생님은 아이들 앞에서 나에게 거짓말쟁이라고 핀잔을 주며 나를 바보로 만들기 일쑤였다. 그때부터 학교생활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순간까지 평탄치를 못 했다. 선생님이 학년 말에 생활기록부에 ‘정서불안, 가정형편 좋지 않음, 거짓말을 잘함’ 이라고 기재했기 때문이다.

  같은 반 아이들은 자연히 나를 따돌리기 시작했다. 학교에 가는 것이 고역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상처는 커져 갔고 학교생활에서의 그 묘하고 머쓱한 상황을 나는 나대로 모면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며 학교를 가야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동대문 스케이트장 입장권을 단체로 팔았다. 몇몇 아이를 빼놓고는 거의가 신청을 한다. 내가 질세라 신청을 하자 선생님은 흘끔 쳐다보며 돈부터 갖고 오라고 하신다. 부끄럽고 창피 했다.그러나 나는 꼿꼿이 서있었다. 선생님은 마지못한 듯 신청권을 주시며 “내일까지 돈 가지고 올수 있냐? 스케이트나 있냐? 허긴 돈만 주면 빌려준다.” 라고 했다. 나는 “스케이트 집에 있어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또 거짓말쟁이 라고 소리를 지를 것 같다. 재차 예 하고는 대답을 하고 신청권을 받아 집으로 돌아왔다. 학교생활이 힘들다는 것을 눈치 챈 어머니는 스케이트장 신청권을 무턱대고 받아온 내가 측은 해 보였는지 싫은 기색을 안 하신다. 가격이 얼마냐고 물으신다. 어머니의 반응에 철없는 나는 좋기만 하다. 얼음판 위에 멋있게 서있는 내 모습을 상상 하니 흐뭇해진다. 우리 집은 큰언니로 인해 가끔 우리 집 형편과는 맞지 않는 물건들 이 생기기도 했다. 스케이트도 그 중 하나였다. 어머니께서는 내 심증을 아시는 것 같이 큰 언니 것이라며 만지지도 못하게 하셨던 스케이트를 손수 꺼내어 신어 보라고 하신다. 이미 식구들 몰래 신어 보기는 했지만 처음 신는 것처럼 시늉을 했다. 유난히 발이 작은 나에게는 맞지 않는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손으로 발가락 앞을 눌러 보시더니 “벗어봐라” 하시곤 솜을 주섬주섬 스케이트 속안에 넣으신다. 발을 다치지 않으려면 솜을 꽉 꽉 눌러 넣어야겠다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신다. 어머니는 잠자코 이불을 피시더니 한번 서보라고 하신다. 가느다란 날이 자꾸 나를 넘어뜨린다. 벽을 잡고 일어섰다. 어머니는 손을 잡아주시며 웃으신다. “안 다치고 탈수 있으려나 모르겠구나.”

  동대문스케이트장을 가는 날은  너무나 행복했다. 맞지 않은 큰 스케이트지만 음악과 함께 빙판을 미끄러져 가며 스피드를 즐길 수 있는 것이 행복했다. 그러나 그곳에서의 빈부차이는,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엄청난 것이었다. 나를 많이 위축되게 하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만큼은 아주 행복한 시간이 되고는 했다. 그러한 학교생활을 거치면서 빈부의 차이로 인한 차별 때문에 겪는 내 마음 상처는 조금씩 쌓여 갔다. 이렇게 시작된 학교생활이 내 인생이 외로움으로 가득 찰 것이라는 징조였는지도 모르겠다.

 

  세 번째로 나에게 다가온 죽음은 우리 친할아버지의 죽음이었다. 어머니와 함께 임종순간을 지켜보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어머니의 손을 꼭 붙잡고 계셨고 어머니는 한없이 울고 계셨다. ‘사람이 죽으면 이렇게 슬피 울 수가 있는 거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의 울음을 이해한 것은 훨씬 후의 일이지만……. 친할머니를 꼭 빼어 닮았다고 유별나게 나를 예뻐하신 친할아버지가 쓰러지시자마자, 어머니는 나를 친할아버지 곁으로 데려가셨던 것이다. 할아버지에게 나를 보여주는 것이 마지막 효도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친손자들보다도 나를 더 예뻐하셨기 때문이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나는 친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그다지 슬픔을 못 느꼈었던 것 같다. 가기 싫은 학교를 며칠 안 가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이상하게도 할아버지의 임종의 순간을  지켜보면서 나는 자살이란 것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죽음의 순간이 인간의 삶 속에 갖추어지는 희망뿐 아니라 고통도 같이 끝낼 수 있는 것이라는 짧은 생각이 스쳐갔다. 친할아버지의 죽음은 나에게 자살이라는 환상을 심어준 계기가 된 것이다. 또한 그 무렵 어설프게 읽은 책 속에서 본 환생이란 단어를 깊이 생각하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죽고 나서의 다른 삶을 상상하기 시작하면 기분이 아주 좋아지기까지 했다. 내 상상의 시발점은 어려서 만화책 읽기에서 시작됐었다. 또한 아라비안나이트의 동화를 읽으며 신비한 세계와 다른 나라에 대해 상상하는 것은 언제나 즐거웠었다. 신기한 마술로 원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그런 상상을 얼마든지 할 수 있었으니까. 





'혼의소리 ,몸의소리본문중에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떠도는 혼령  (0) 2004.04.20
굿공연과 록뮤직  (0) 2004.04.19
굿공연의소고  (0) 2004.04.19
어린 시절 죽음 의초상과 가위눌림  (0) 2004.04.19
영혼결혼식과 찍새  (0) 2004.0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