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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죽음 의초상과 가위눌림

담박제 2004. 4. 19. 23:15
 

  어린 시절 죽음의 초상과  가위눌림


  내가 예닐곱 살쯤 그 당시 지독히도 가난했던 우리 집은 그 당시 충무로4가 영화의 거리에 좁고 어두운 골목 안에 거의 쓰러질 듯 한 이름만 집인 판자 집의 문간방이었다. 일년 내내 햇빛 한줄기 스며들지 못하는 우리 집은 대낮에도 놀다가 집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장님처럼 더듬으며 들어가야만 했다. 아테네극장 뒷골목에서는 가끔씩 유명한 배우들이 영화촬영을 하곤 했는데 지금도 생생히 기억이 나는 것은 신성일 주연의 “맨발의 청춘”이다. 영화를 촬영할 때에는 재미난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다. 양은 바가지에 물을 퍼 담아 날랐고 길 다란 호수를 사용해서  비 오는 뒷골목의 모습을 찍을 때 그 남배우는 그 골목에서 고통스러운 몸짓을 자아기도 했다. 동네 아이들과 우르르 몰려가 야단을 맞으면서도 구경하는 재미가 그만이었다.

  혼자 아무것도 안하고 있으면 가끔 중국인들이 등장하는 장면이 떠오르고는 했다. 왜 가끔 그런 기억들이 떠오르는 건지는 나중에서야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그 까닭을 알 수 있었다. 내가 네 다섯 살 무렵에 우리 집은 충무로로 이사를 했고 아예 내가 아역 배우로 영화에 등장한 적이 있었다고 말씀하신다. 그때 중국인으로 분장한 유명한 배우 신영균씨가 나를 안아 주곤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어린시절을 더듬으면 생생히 떠오르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중국옷차림의 사람들이 번쩍이는 불빛아래 왔다 갔다 하는 모습들이었다.

  그 이외에도 내가 언니를 쫓아 유일하게 즐길 수 있는 것이 만화방이었는데, 만화를 볼 돈이 없어 나무 상자로 만든 찬장 속 그릇에 있는 돈을 언니와 함께 살짝 꺼내어 만화방으로 달려가곤 했다. 그런 식으로 실컷 만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오면 어머니에게 “커서 뭐가 되려하냐”고 무섭게 야단을 맞기도 했다. 그러나 만화를 읽은 덕분에 한글을 학교 가기 전에 깨쳤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슬그머니 웃음이 나온다. 

  그때는 지금 생각해보면 어찌나 추웠던지, 방 안에 있는 자리끼가 얼을 정도였다. 그 춥던 겨울밤에  입에 풀칠이라도 해야만 하는 절대 절명 의 상황에 처해 있던 어머니는 편물 집에서 일거리를 가져와 스웨터를 꿰매셨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귀찮아하는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었는데, 갑자기 얼마 전에 죽은 여동생이 떠오르며 죽는다는 것을 상기하고는 공포로 떨었다.

사람이 죽으면 숨을 쉬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자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두려움에 진저리를 쳤다. 그러면서 어린 내 머리 속에 동생을 담았던 조그마한 사과상자가 떠올랐고, 연이어 무덤을 연상하고는 어린아이 수준으로 생각할 수 있는 어머 어마한 양의 흙더미가 누워있는 내 몸 위를 덮쳐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가위눌림의 시작이었다. 물론 내가 한참 뒤에 사고능력이 생겼을 때 그 현상이 가위눌리는 거란 것을 알았고 그것이 대단한 공포를 유발한다는 것도 알았다. 아마도 예닐곱 살에 이런 현상들을 느낀걸 보면, 지금 신명을 모시고 살아가는 무당이 될 수밖에 없는 징조의 시작 이였던 것 같다.

  누구나 어려서의 경험과 느낌들이 정서 속에 잠재되어 살아가는 데에 커다란 영향을 주기도 하지만 유독 나의 어릴 때의 기억을 더듬어보면 우울하고 궁색해지는 것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 궁색하고 우울한 기억이 나쁘지만은 않다. 그 기억들이 나에게 항상 에너지를 불러일으키게 해주기도 했고, 또한 그 기억들이 의외로 내가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만든 적도 많았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해 실제적으로 골몰히 생각하게 된 것은 내동생의 죽음으로 시작됐다. 내가 너무 어려서 죽음이 무엇인지 잘 알지는 못한 시절이었지만 동생의 죽음은 아주 생생히 내 기억 속에 자리를 잡은 사건이었다. 내 동생은 갓난아이일 때부터 엉덩이에 혹이 커다랗게 달려있었다. 물렁물렁한 것이 달려 있는 게 이상하고 신기해서 호기심에 만져보기도 했다. 그것이 그 갓난아이에게 얼마만큼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인지는 생각도 못했다. 당연할 수밖에…….  좁은 골목 안의 가난한 생활이  궁색하다는 것조차도 잘 모를 때였으니까. 어린 나에게 그 이외의 다른 세상을 상상한다는 것은 무리였을 것이다.

  나중에 커서 알고 보니 동생은 기형아였다. 편히 뉘이지도 못하고 항상 엎어서 키웠다. 어느 날 사과 궤짝 같은 것이 들어왔고 미경이는 그 속에 엎드려진 상태로 뉘여 졌다. 그렇게 뉘여 있는 것이 꽤 불편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어머니의 작은 한숨과 함께한 넋두리에서 이었다.

“어린 것이 얼마나 불편했을까 죽어서도 저 불편한 몸으로 편히 눕지를 못하고 가는 구나”

그러나 그런 어머니의 말씀은 깊게 생각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고 아주 잠시 동안 머릿속에서 스쳐갔던 것 같다. 슬프거나 울음이 나오지는 않았다. 다만 그 뉘여 있는 불편한 모습이 때로 내 기억 속에 남아 상기되곤 했다. 너무 어려서인지 그때는 두려움도 못 느꼈던 것 같다. 단지 그 사과 궤짝이 미경이가 하늘나라로 가는 배라고만 생각했었다. 왜 그 당시 그것을 배라고 생각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우리집안은 딸 다섯에 아들이 하나이다. 미경이가 떠 난 뒤 딸은 넷이 됐지만……. 셋째 딸인 나는 모든 면 에서 다른 형제들 하고는 달랐다. 하다못해 생김새도 닮은꼴이 아니었다. 굶기를 밥 먹듯이 한 집에서 우리 여형제들은 항상 허기져 있어야했다. 아들이 하나라고 어머니는 딸들과 당신은 굶더라도 아들은 굶기지 않으려 애를 쓰셨다. 갓난아이였던 내남동생이 뭔가를 먹기 시작 하면 우리는 꿀꺽 꿀꺽 침을 삼키며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곤 했다. 물론 어머니의 눈을 피해 슬쩍슬쩍 탐을 내곤했다.

  그런 시기에 아버지와 잘 아시는 분이 커다란 오버 속에 나를 앉고는 여기저기를 다니셨던 것이 기억이 나서 어머니에게 후에 여쭤봤다. 어머니께서는 그분이 “안사람과 사이에 애가 없고 사는 형편은 그만하니 해경이를 데려다가 양녀로 삼아 곱게 키웠으면 좋겠는데 의향이 어떠시느냐” 며 어머니에게 간청을 했다고 말씀해주셨다. 그분 외에도 부모님의 친지 중 우리집안 형편을 잘 아는 분들은, 나를 데려다가 미국에 가서 공부도 시키고 잘 키울 테니 양녀로 달라는 사람도 있었고 호강시켜 키워주신다고 달라는 분들도 여럿 있었다고 하신다.

  “왜 보내지 않았느냐” 는 내 물음에 어머니께서는 “보낼까도 생각했지만 굶겨 죽여도  내 품에서 죽여야지 도저히 보낼 수가 없더라!” 며 웃으신다. 살아가면서 내가 어머니의 애간장을 태우는 것이 미안하면 궁여지책으로 “그 때 그분에게 나를 양녀로 보냈으면 지금 이 모양으로 안살수도 있지 않았냐고”하며 소리를 질러대서 어머니를 곤혹스럽게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아무튼 난 우리식구들하고는 많이 달랐다 돌연변이라고나 할까? 지금도 어머니는 나를 도깨비 또는 홍길동 또는 여자 김 삿갓 이라고 부르곤 하신다.


   내가 두 번째 죽음을 접한 것은 충무로 4가에서 국민 학교에 입학한 해에 학교에 가려면 거쳐야만 하는 지금의 중구청 뒤인 인현동 골목길 에서였다. 싸움 끝에 수류탄이 터져 남자 몇 명이 죽었다. 그 시체들이 갈기갈기 찢겨져 좁은 골목에 흩어졌고 사람의 내장들이 흩어져 전봇대 등에 빨래가 널려있듯이 널려져있는 것을 언니와 함께 목격 했다. 그 후 우리 집이 이사를 할 때까지 한참동안 학교에 가려면 그 골목을 피해 먼 길로 돌아가야 했다.     그 사건으로 인해 사람이 죽으면 숨을 못 쉬게 된다는 두려움과 더불어 귀신이 된다는 것까지 보태어져 나는 밤마다 가위에 시달려야 했다.

  이렇듯 어린 시절 만났던 죽음의 초상들은 일찍부터 공포의 가위눌림을 본격적으로 경험케 했고, 급기야는 그 공포에 빠지지 않으려고 여러 날 밤을 잠들지 않기 위해 무진 애를 썼었다. 뒤돌아보면 올빼미처럼 무작정 밤잠을 자지 않는 지금의 생활습관은 굉장히 오래 전부터 다져진 고질적 증세라고 생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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