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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결혼식과 찍새

담박제 2004. 4. 19. 23:09
 

   영혼결혼식과  찍새


내림굿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자 손님들이 와 있었다. 상담을 하면 저마다 대단히 만족해하며 돌아갔고, 연이어 사람들을 연결시켜줬다. 내림굿은 했지만 신당을 만든 것은 아니었다. 자그마한 상위에 옥수 그릇만 올려놓고 있던 터였다.

하루는 공장주인이 내려왔다. 천주교를 믿고 있는 집안에서 무당의 행위를 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며 이사해줄 것을 요구했다. 막막했다. 내가 무당의 길을 가더라도 공장은 어떻게 해서든 유지하고 싶었다. 잘 번성시켜서 내 밑에 일을 보던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었다. 마침내 나는 혼자라도 이사하기로 했다. 그러자 묘하게도 돈이 준비됐다. 굿을 몇 자락 낸 것이다.

내게 점 보러 온 사람들이 어떤 문제에 처해있는지 신기할 정도로 잘 보였다. 문제점을 일러주곤 내가 모시고 있는 신명을 통해 해결방법을 찾았다. 사람들에게 나는 아주 씩씩하게 굿을 하라고 권유했고, 사람들은 흔쾌히 날을 잡아 굿을 했다. 그러면 나는 돈암동 신어머니에게 전화를 한 뒤에 굿할 날짜를 받는다.

굿을 마치고 나면 상담자들은 늘 고마워했고, 주위에 또 다른 고민을 안고 있는 분들까지 소개해왔다. 물론 나는 전혀 굿을 할 줄 모른다. 주로 굿 진행은 돈암동 어머니가 주관하셨다. 그렇게 굿을 몇 자락을 하고 나니 복채로 받는 돈이 모여져서 공장 바로 앞, 슈퍼 지하에 원룸으로 셋집을 얻어 신당을 꾸몄다. 보증금 삼백만원에 16만원의 세를 주기로 했다. 공장에서 신명을 모시고 나와 신당으로 오니 이제 정말로 무당이 된 것 같았다.

3단으로 작게 차려진 제단에는 사기로 된 옥수그릇과 촛대와 향로가 놓여진다. 제단 위에는 붓글씨로 씌어진 신명의 이름이 걸려있다. 나는 열심히 그 앞에 꿇어앉아 돈암동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기도를 한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하더니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찾아오는 이들이 점점 늘어갔다.

하루는 굿을 신당에서 올렸다. 길거리에서 굿을 행했다. 그때만 해도 긴가민가했던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들었다. 외국인이 많이 사는 동네인 탓에 통돼지를 길 위에 놓고 삼지창에 세우는 것을 처음 본 서구인들은 놀란 눈으로 카메라를 들이대기도 했다. 내가 내림굿을 하기 전까지 몸이 아파서 많은 고생을 한 걸 아는 동네사람들이라 시끄럽다고 질책을 하지 않고 외려 축하를 해주었다 

밤에는 손님과 상담을 하고 아침에는 굿 당으로 굿하러 가는 날이 거듭되면서 나는 점점 더 잠을 못 자게 되었다. 정신없는 나날이었다. 내 밑에 있던 후배 아이는 굿에 재미가 들었는지 통 공장 일을 하지 않으려 했다. 결국 공장은 아주 헐값으로 처분하고 말았다. 석달만에 방이 세 개 달린 슈퍼 삼층으로 이사를 갔다. 내 밑에서 일을 보던 아이에게는  운전면허를 따게 했다. 그 시절만 해도 내 인생에서 가장 편안한 시기를 맞는 것 같았다

어느 날, 한 아가씨로가 찾아왔다. 남동생이 오토바이 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내게 그 동생의 넋이 실린 듯 아가씨를 붙들고 울고불고 말았다. 아가씨는 죽은 동생이 살아 돌아온 듯 나를 붙들곤 하염없이 울었다. 부유하게 살다가 집안형편이 어려워지자 아가씨는 술집을 전전했고 철없는 동생은 친구들과 몰려다니다가 그만 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며칠 뒤 아가씨가 애인과 함께 나를 찾아왔다. 그 애인을 보자마자 나는 말했다.

“나라의 녹을 크게 잡수시는군요. 올해 조금 변동수가 있겠습니다. 해외 지사로 나가게 될 것입니다. 해외에 다녀오신 뒤에는 선거에 임하셔도 됩니다.”

색안경을 쓰고 나를 관찰하던 그 분은 아가씨 더러 이곳에서 날을 잡으라고 했다. 아가씨는  나보다 무당이 하는 일을 더 잘 알고 있었다. 사실 그때까지 나는 영혼결혼식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 순간 당황했다. 돈암동으로 전화를 했다. 돈암동 어머니는 준비할 것이 많으니 사흘 뒤쯤에 하자고 하셨다.

두 사람 모두 흔쾌히 그러자 한다. 그때 남자 분이 경비는 얼마나 드느냐고 물어왔다. 그러나 말할 수가 없었다. 영혼결혼식 이라고는 그 날 처음 들었고, 어떻게 진행하는 굿인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대답 못하는 내 속사정도 모른 채 그 남자는 ‘아직 때가 묻지 않으셨군요. 라면서 몇 백 만원을 선뜻 내놓고는 준비를 부탁한다. 당황스러웠다. 그 길로 돈암동을 찾았다. 돈암동 어머니는 내가 허둥대며 돈을 꺼내놓자 ‘네가 고생을 많이 해서 신명이 너를 살리는가 보구나. 이제 너는 신운이 열렸다. 그럴수록 열심히 신명에게 매달리거나“ 하시면서 아무 걱정 말라고 하셨다.

사흘 뒤 삼국사에서 굿이 벌어졌다. 혼례상은 호화스럽게 차려져 있었고 사람 크기만 하게 짚으로 만든 두 개의 인형이 있었다. 남자 인형에게는 사모관대가 입혀졌고 여자 인형에게는 족두리와 고운 한복에 당의까지 입혀졌다. 여기 저기 수소문을 하자  마침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처녀를 찾아 낼 수 있었다고, 돈암동 어머니는 말씀을 하신다.   여자의 사주를 적은 것을 여자인형의 속에 넣었다. 똑 알맞게 인연이 되었다. 의뢰한 아가씨의 남동생의 사주와 죽은 날짜를 적은 한지도 남자 인형 속에 넣어졌다.

더러 나는 굿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회의를 느끼곤 했다. 굿이 내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고, 어떤 부분은 트릭이 섞여져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럴 때면 의구심을 풀기 위해 돈암동 어머니께 여쭈어보지만, “그러다가 신벌을 당하려고 그러냐” 면서 말을 가로막곤 하셨다.

그런데 이날만큼은 신기했다. 여느 굿처럼 굿이 진행되다가 신랑 신부의 혼례 절차가 시작된다. 동암동 어머니의 신의 동기인 이모는 주례가 되어 있었고 돈암동 어머니는 신랑을 붙잡고 계신다. 황보살과 신보살이 신부 양옆에서 맞절을 시키고 있다. 합환주가 오고가고 모조품인 예물까지 서로 오간다.  그리고는 닭을 날리고 폐백까지 드렸다. 아가씨는 내내 슬퍼서 흐느끼고 애인은 흐뭇한 표정으로 서 있다. 굿을 의뢰한 것에 대해 대 만족하는 것 같다

방에는 비단금침이 깔렸다. 신방을 꾸민 것이다. 불을 꺼주고 인형을 이불 위에 누이곤 모두 방을 나왔다. 국수를 삶았다.  그날,  삼곡사에 일을 하러온 다른 무당과 공양주 까지 모두가 나누워 먹으면서 결혼식을 축하하는 것이다.

한참 후에 방으로 들어가니 이모가 이불을 펼쳐 보여 준다. 어떤 연유에서인지 나로서도 이해가 가지는 않는 일이였지만 신기한 일이 벌어 진 것이다. 두 인형은 마주 본 형태로 꼭 끌어안고 있었다. 그 남자와 아가씨도 그 장면을 보았다. 이모는 합방을 아주 잘한 것 이라고 했다. 우리 셋은 신기해하면서 매우 흡족해 했다. 무당 초보자인 나로서도 귀신의 조화를 체감한 것이다. 합방을 했으니 이제는 신랑과 신부가 같이 있을 수 있는 곳으로 보내야 한다면서 신보살이 신랑을 앞세우고  황보살이 신부를 들고 뒤따라간다. 나보고  비단 금침을 싸들고 뒤를 따라 가라고 했다. 시키는 대로 이불을 싸들고 뒤쫓아 갔다. 마당을 한바퀴를 돌고 나서 소각장소로 향했다. 인형과 준비한 예물들을 함께 태웠다. 불길은 거세어지고 불길을 바라다보는 내 마음은 착잡했다. 죽은 혼령들을 저렇게 위하는 것이 무당이 할 일이었던 것이다.

무당은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매개체이며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갈등까지도 해소 시켜주는 그런 존재였다  산 자와 죽은 자의 한풀이를 해주고 서로의 이해와 화해를 도모하는  것이 무당이었다. 죽은 이는 살아서 못 다한 한을 무당의 몸을 빌고 혀를 빌어 자식에게 또는 남편에게 일가친척들 에게  한풀이를 하며 못 다한 이승의 삶을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시구들 은 넋을 달래어 이승과의 연에 연연하지 않고 극락세계로 으로 돌아가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그것이 무당이 해야 할 가장 큰 책임이었고 의무였던 것이다. 

본격적인 신령님들의 놀이가 시작 됐다. 돈암동 어머니는 굿거리에 들어서자마자 아주 명석할 정도로 그 남자애인에 관해 뽑아내어 공수를 주기 시작한다. 거기까지는 다 좋았다. 이때 별비라는 것을 내놓으라고 하기 시작했다. 내 얼굴이 뜨거워질 정도로 받아내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강탈이었다. 주머니에 수표가 들은 액수까지 짚어내고 있었다. 처음에야 흔쾌히 내주던 남자의 얼굴이 갈수록 묘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나는 무안해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면서도 그저 이런 것이 굿이라고 만 생각했다. 그 때문에 돈암동 어머니를 말릴 생각도 못했다. 그냥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그분 주머니에 있던 돈이 다 떨어지자 굿도 끝났다. 어머니가 나누어주는 돈을 받아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영 찜찜했다. 그 남자의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계속 떠올랐다. 처음부터 나는 돈의 액수를 따지지 않았다. 나는 굿을 할 줄 모르는 애동이였고 굿은 이모와 돈암동 어머니가 힘들게 하시니 그냥 주는 대로 받아왔다. 많다고 생각이 되면 외려 받은 돈의 일부를 다시 꺼내어 드리면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곤 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남자 분이 아가씨와 함께 내게 드릴 말씀이 있다면서 찾아오셨다. 마주 앉은 나는 죄지은 사람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오늘, 애 많이 쓰셨습니다.”

머쓱했다. 사실 내가 한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은 이선생님은 찍새에 불과 합니다.”

“찍새요?”

“이렇게 말씀드려 죄송하지만 혹 찍새라는 의미를 아시는지요?”

그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데, 진심으로 나를 위한 빛이 뿜어져나온다.

“구두닦이, 아시죠? 구두를 닦는 사람은 딱새라고 하고요, 다방이나 회사를 다니면서 어디선가 구두를 찍어다 주는 사람을 찍새라고 합니다. 찍새가 구두를 찍어오지 못하면 딱새는 일거리가 없어지지요. 딱새는 찍새가 찍어다주는 구두를 닦고 그 대가는 서로 나누는 겁니다.”

이분의 설명을 다 듣기도 전에 지금 내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그래, 맞는 얘기다. 나는 찍새에 불과했던 것이다. 아무 것도 할 줄도 모르면서 무당의 본질에 관해 생각할 틈도 없이 일감을 물어다가 신어머니에게 맡기고 주는 용돈을 챙겨온 나였다. 그 어떤 사명감이나 소신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 순간에 그  남자 분은 내 스승이 되어 앞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제가 이 선생님을 탓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그 말에 나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자세를 반듯하게 고쳐 앉으면서 말했다.

“선생이란 호칭을 빼주세요, 정말 부끄럽습니다.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을 깨닫게 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이 사장님이야말로 제겐 스승이십니다."

"아아, 아니에요. 제가 이 선생을 부끄럽게 하려고 말을 꺼낸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 선생님을 처음 뵈었을 때의 신뢰감은 지금도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제가 많은 사람을 상대하다 보니 사람의 내면을 조금은 읽을 수 있습니다.  그저 안타까운 마음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 이 선생님은 지금부터라도 무당의 수업을 제대로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무당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우셔야 합니다. 굿이란 것도 제대로 잘 배우셔야 오늘 같은 일이 생겨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제 주머니에서 돈이 나간 것이 아까워서 드리는 말씀은 절대 아닙니다. 지나친 처사로 정성을 올리는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만든 것은 무당이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드리는 돈과 강탈당하는 듯 하는 것과는 천지 차이기 때문입니다. 제 말씀을 이해하실 분이기에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내내 부끄러워 잠자코 있었다. 그렇게 그분은 내게 무당으로서의 자세를 다잡게 만든 분이셨다. 며칠 뒤 다시 그 아가씨와 함께 나를 찾아왔다. 죽은 동생이 어떤 여자와 함께 꿈속에 찾아왔다는 것이다. “누나 정말 고맙습니다.”라고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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