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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 난 끼는 바로 이런게 아닐까?

담박제 2007. 2. 21. 16:38

한겨레신문 2월 21일자  퍼옴

 

 

 

아침엔 회사 출근 밤엔 공연장 출근

 

오대환 씨앤엘뮤직 음악감독

 

» 어린 시절 지미 헨드릭스를 좋아했던 오대환 음악감독은 세기가 바뀌고 지천명의 나이를 넘기면서 국악이 지닌 느림의 미학에 푹 빠졌다. 30여 년 동안 음악을 듣고 공연을 보면서 종자기의 귀를 갖게 된 그는 음반을 통한 국악의 대중화에 남은 생을 걸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오대환 ㈜씨앤엘뮤직 음악감독은 요즈음 작은 희망을 품고 산다. 국악도 시장에서 통할 수 있다는. 근거는 그가 만든 가야금 앙상블 여울의 가야금 연주곡집 〈행복한 이야기〉다. 지난해 말 나온 뒤 4000장 가까이 팔렸다. 가요 앨범도 십만장을 넘으면 히트로 여기는 음반시장 최악의 침체기에 더구나 국악음반으로는 대박이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라틴 타악기를 쓴 가야금 연주 음반에 대해 “요즘 돈이 궁하냐?”고 빈정거린다고 한다. 〈침향무〉 〈비단길〉 〈춘설〉 등 가야금 명인 황병기 작품집, 김정자 가야금 정악 〈하늘과 땅 그리고 명상〉, 허윤정 거문고 독주곡집 〈일곱개의 시선〉, 강권순 여창가곡 〈천뢰〉, 유경화의 철현금 연주곡집 〈공감〉 등, 중후, 정통, 무게와 같은 말이 어울리는 음반을 냈던 그다.

그러나 오 감독은 “나쁘게 말하자면 나쁘게 말할 수도 있다”면서도 “이 음반은 국악에 친숙하지 못한 사람을 국악으로 안내하는 가이던스 음반으로 연주력, 녹음 테크닉, 포장 그래픽 등에서 최고 수준이라고 자부한다”고 말했다. 오 감독은 이전에 낸 음반들도 “국악의 미학을 잃지 않되 현대인의 감성에 닿도록 애썼다”며 “모두 회사에 용돈 정도는 벌어줬다”고 말했다.

실제 그가 만든 국악 음반은 오디오 애호가들 사이에 오디오 테스트용으로 쓸 수 있을 정도로 음질이 좋다는 평가를 받는다.

“먹고사는 데 필요한 돈은 딴 데서 번다”는 말처럼 오 감독은 음악감독으로 공연, 패션쇼, 무용 등 다양한 장르에서 솜씨를 인정받고 있다. 지난해에는 다큐멘터리 〈사이에서〉의 음악을 맡아 장르를 넓혔다. 유명 디자이너의 패션쇼는 물론, 이름난 무용가의 작품 배경음악을 자주 맡을 정도로 솜씨를 인정받는 오 감독이지만 “요즈음 국악에 비중을 크게 두고 있다”며 얘기가 ‘곁가지’로 흐를까 조심했다.


오 감독은 국악이 담고 있는 느림에 반했다. 그가 듣던 음악은 주로 스피드가 빠른 서양 음악들이었다. 반면 국악은 스피드를 거스르는 속에 미학이 있었다. 그는 “국악이 세계 최고라고 주장해서는 안된다”면서도 “화합을 통해 무엇을 만들어내는 서양음악과 달리 화합 가운데 어마어마한 개인주의가 담긴 가장 민주적인 음악”이라고 평가한다.

 

 

월급 절반 뚝 잘라 공연관람·음향장비 투자
집안 반대로 막힌 음악인 꿈 펼치려 귀동냥·눈동냥
배경음악 기회 잡자 ‘준비된 프로듀서’로 실력발휘
자신의 삶처럼 느림미학 담은 국악에 생 걸었다.

 

 

그의 인생도 국악처럼 속도가 느리다. 어려서 음악에 푹 빠졌던 그는 보험감독원과 섬유회사 이사로 일하며 16년의 세월을 돌아 전업 음악인의 길에 들어섰다. 그는 어릴 때 지미 헨드릭스 같은 기타리스트가 되고 싶었다. 중학교 2학년 때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지만 두 달 만에 그만뒀다. “귀로 들은 그 어마어마한 음악이 내 손끝에서 나올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신 새로운 길을 발견했다. 음반을 꼼꼼히 들여다보면서 음반 제작에 참여하는 사람에 따라 같은 연주자의 음악도 다르게 들린다는 점을 알게 된 것이다. “같은 아티스트가 연주를 해도 리코딩 엔지니어나 프로듀서가 바뀌면 컬러가 달라지더군요.”

 

연주자의 꿈을 접은 대신 에릭 클랩턴과 올먼 브러더스 밴드의 앨범 프로듀서였던 톰 다우드 같은 리코딩 엔지니어가 되고 싶었다. 그 분야에서 가장 앞선 나라가 독일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고교 시절이었다.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리코딩 엔지니어는 딴따라의 시다바리로 여겨지던 시절이었습니다.” 유학을 보내달라고 했더니 아버지는 어이가 없었는지 대꾸조차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남들처럼 대학을 졸업하고 보험감독원에 취직해 일했지만 음악의 꿈을 버릴 수가 없었다. 공연장을 찾는 습관도 바뀌지 않았다. 어릴 때처럼 공연이 있는 날이면 퇴근하자마자 공연장으로 달려갔다. 한달에 보름 이상 공연을 본 적도 많았다.

공연 관람은 큰 공부였다. 어두운 공연장에서 “한석봉이 글씨 쓰듯” 느낀 점과 자신이라면 이렇게 했을 거라는 내용을 팸플릿에 적었다. 공연이 끝나면 분장실로 가 연주자, 무용가, 음악감독 등 전문가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후배 여자 친구의 졸업 무용 발표회 때 배경음악을 맡아 교수들로부터 격찬을 받은 뒤 더욱 자신감이 생겼다.

“선수들끼리 알아본다고 공연장에서 알게 된 사람들로부터 음악을 맡아달라는 부탁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보험감독원에 다니면서 무용이나 패션쇼의 배경음악을 많이 했다. 집에서 오디오 믹서로 편집을 한 “콜라주 음악”이었지만 솜씨는 뛰어났다. 1991년 디자이너 김동순씨의 일본 도쿄컬렉션 배경음악을 맡을 정도였다. 1995년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 음악감독의 길에 들어섰을 때 이미 그는 최정상급의 음악감독이었다.

“자식에게 안정된 삶을 물려주는 것보다 자기가 생을 걸 수 있는 일을 찾아주는 게 부모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제게는 국악이 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오 감독은 그래서 공연을 보러 가거나 음반을 사는 데 드는 돈을 두말없이 주던 아버지와 월급의 절반 이상을 관람료와 음향 장비를 사들이는 데 쓴 자신을 참고 지켜봐준 부인 이난희씨가 늘 고맙다.

권복기 기자 bokkie@hani.co.kr


 

 

제가 존경하는몇몇 분중에 한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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